[교구] 천도교임실교구
명칭 | 천도교임실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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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교구장 윤철현 |
전화 | |
휴대전화 | 010-3659-7042 |
지역 | 전라북도 |
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봉황로 105 |
홈페이지 | |
방문자 수 | 1693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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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천도교 임실교구 소개
임실은 동학이 전해진 매우 중요한 지역입니다. 해월 최시형 신사(神師)께서 1873년 3월, 전라도 장수 출신 김신종과 함께 지금의 임실군 청웅면 조항마을에 있는 허선의 집과 강진면 갈담리의 표응삼의 집에서 약 35일간 머무르며 동학의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실 지역에 동학이 처음으로 전해진 시기입니다.
동학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로는 김개남 접주가 있습니다. 그는 전라북도 태인 출신으로, 젊은 시절 청웅면 성밭마을에서 서당 훈장으로 일하다가 21세가 되던 해인 1873년에 동학에 입도하였다고 그의 손자가 증언하였습니다. 이는 해월 선생께서 임실에서 설법하셨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는 증언입니다.
동학이 임실에 전해진 이후,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시기에는 임실 지역에 6개의 ‘연원’(당시 동학 조직의 기본 단위)이 있었고, 그 산하에는 무려 31명의 동학 접주들이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임실 지역에서 동학이 얼마나 널리 퍼지고 강력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무성서원의 색장이었던 김영원 또한 동학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입도하였으며, 당시 임실(청웅) 지역의 현감(지방관)도 동학에 입도함으로써, 다른 지역과 달리 임실은 동학에 대한 억압이나 박해 없이 평화롭고 살기 좋은 지역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임실군은 거의 모든 군민이 만세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민족 자주정신이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는 천도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민중의식과 실천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924년 발간된 『천도교회 월보』 제167호 8월호에 실린 박래홍 선생의 『전라행』이라는 기행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실은 전라북도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종리원이며, 청웅면 새목터(현재의 조항마을)는 동학혁명 당시 동학 제2두령의 거처였기 때문에 해월 신사께서 자주 이곳을 방문하셨고, 항상 말씀하시기를 ‘임실은 산의 기운이 좋으니 사람이 많이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동학혁명 당시 임실군은 동학을 믿지 않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해월신사께서는 1894년 11월에도 임실을 다시 찾으셨습니다. 『천도교회사초고』에 따르면, 해월신사께서는 장수군 계남면 신전리 박일양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신 후, 동면 동촌리 김종학의 집에서 또 하루를 머무르시고, 산서면 동곶이를 거쳐 남원을 지나 임실군 양경보의 집에서 수일을 유숙하셨습니다. 이후 동면 조항리 허선의 집에서도 며칠을 머무르셨습니다. 이때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이 패한 직후였고, 의암 손병희 성사(聖師)께서 이곳 허선의 집에 계신 해월신사를 찾아와 함께 피신하며 다시 북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04년(포덕 45년) 갑진년에는 임실 지역 천도교 교인들도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국정 개혁과 생활 개선 운동을 펼쳤으며, 청웅면 남산리에서는 무려 500여 명이 머리를 짧게 자르는 단발을 시행하여 근대화에 앞장섰습니다.
1905년 12월 1일, 의암 선생께서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교단 체계를 정비하셨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1906년에는 임실에 제1교구(최승우 교구장, 운암면 지천리)와 제2교구(박준승 교구장, 청웅면 구고리)가 조직되었고, 1908년에는 두 교구를 통합하여 임실교구가 세워졌습니다. 이후 1916년에는 교구의 중심을 임실읍으로 옮겨 지금까지 교화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천도교는 단순한 종교 활동에 그치지 않고 교육과 민족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천도교 임실 제1교구장이었던 최승우은 배일(排日) 사상과 민족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들여 1906년 8월 15일, 청웅면 구고리에 ‘삼화학교’(일명 사마재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길러냈으며, 배일 정신을 함양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제의 탄압을 받아 1909년 폐교되고 말았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임실교구장 한영태는 서울에서 기미독립선언서 200장을 받아와 교구 조직을 중심으로 둔남면, 운암면, 청웅면, 성수면 등 임실군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벽보와 격문을 붙이며 민중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였습니다. 그 결과 1919년 3월 12일, 임실장터에서는 수많은 군중이 함께한 대규모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1924년에 간행된 『임실군지』(한문 활자본)에는 “천도교 교구실은 현재 임실면 성가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천도교 임실교구는 김창희 씨로부터 땅을 구입하여 1930년 지금의 건물을 새로 지었습니다. 건물의 상량문에는 ‘포덕 71년(布德 七十一年)’이라고 쓰여 있어, 처음부터 천도교 교당으로 세운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임실교당은 좌우대칭형 한옥 건물로, 좌우 모두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구조는 초기 근대 종교 건축물인 김제 원평금산교회와 유사하지만, 천도교는 가족 단위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남녀를 분리하는 공간 개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천도교 임실교당의 ‘ㄱ’자형 건축은 기독교식 교회 건축물이나 일반 주거용 한옥과는 다른, 독특하고 이형(異形)적인 종교 건축물입니다.
천도교 건축물 중에서 임실교당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 곳으로는 ‘봉황각’의 내실이 있습니다. 봉황각은 의암 선생께서 1912년에 구상하여 세운 ‘을(乙)’자형 건물로, ‘궁을(弓乙)’ 사상과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반영한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봉황각의 내실은 ‘ㄱ’자형 건물로, 이를 ‘사람(人)’을 형상화한 구조라고 보고, 봉황각 자체는 ‘마음(心)’을 형상화한 건물이라고 이해합니다. 이 둘을 합치면 위에서 볼 때 ‘궁(弓)’자가 되며, 이는 천도교가 중시하는 사람의 마음과 한울의 뜻이 하나로 이어지는 철학을 상징합니다.
천도교 임실교당은 민족의 자주정신과 신앙ㆍ교육ㆍ독립운동 그리고 천도교의 깊은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주소 : 임실군 봉황로 105
교통 : 임실역에서 임실교당으로 가는 버스가 있습니다. 버스와 도보로 22분 소요
임실군 천도교(동학) 유적지
임실역 =>(19Km, 21분)=>① 운암 3대 기념비(운암초등학교) =>(15Km, 19분)=>
② 삼요정 =>(9.4Km, 13분)=>③ 박준승 선생 생가 =>(2Km, 도보 포함15분)=>
④ 해월신사 은거지=>(16Km, 19분)=>⑤ 천도교 임실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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