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천도교아산시교구(아산교구)
명칭 | 천도교아산시교구(아산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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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교구장 채수엽 |
전화 | 041-548-4455 |
휴대전화 | 010-4018-3746 |
지역 | 충청남도 |
주소 | 충남 아산시 번영로 115번길 21-8 |
홈페이지 | https://blog.naver.com/donghakasan |
방문자 수 | 1585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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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천도교 아산교구 이야기 – 동학의 숨결을 잇는 곳
충청남도 아산에는 1880년대 초부터 동학이 전해졌습니다. 그 뒤 아산 지역 동학 교도들은 1894년 가을,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내포 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했습니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후에는 1908년에 아산전교실(아산지역 교당)이 생겼고, 이후 3·1운동과 일제에 맞선 ‘멸왜기도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며 독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교인 수가 크게 줄었지만, 6·25전쟁 이후 남쪽으로 내려온 천도교인들이 합류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의 천도교 아산교구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아산교구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
아산의 동학과 천도교 이야기
충남 아산의 동학은 지역 인물인 안교선, 김경삼, 정태영(신창), 곽완(아산), 이신교(온양) 등의 활동으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1894년 동학농민군은 홍주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많은 이들이 희생되거나 산속으로 숨어들었으며, 이름을 바꾸거나 다른 종교에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3·1운동 때 아산 지역은 천도교가 중심이 된 만세운동의 주요 무대가 되었습니다. 3월 14일 온양장터와 4월 4일 선장에서는 수많은 군중이 독립선언서를 나누고 만세를 불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체포되거나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아산교구의 현창규는 3월 14일 온양장터에서 서만수, 권태원, 김치삼 등과 함께 100여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쳤고 22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정규희는 동학 접주였던 정태영의 아들이며, 김천봉,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과 함께 4월 4일 선장 장날에 200여 명의 군중을 조직하여 독립만세를 불렀었습니다. 정규희는 또한 군중을 지휘하며 선장면 헌병주재소에 돌입하여 투석전을 전개하여 함께한 5명과 함께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1936년에는 천도교 4세 대도주인 춘암 박인호 상사의 지시에 따라 일본의 지배를 끝내자는 ‘멸왜(滅倭) 기도운동’이 벌어졌고, 아산 지역 교인들도 식사 후 기도를 올리며 독립의 염원을 담았습니다. 이 운동은 결국 일제에 발각되어 3월 중순부터 4월 초에 여러 교인이 체포되었으며, 이규호·이보성·강창주·이창운·이명구·이종일·이종선·정규희 등은 온양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7~13일 만에 석방되었으나 이후에도 아산 교인들의 저항 정신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산교구의 성장과 변화
현재 교당은 아산시 번영로115번길 21-8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매주 일요일 11시에 시일식을 봉행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아산교구
아산교구는 1880년대 동학을 받아들인 이래 동학농민혁명과 일제강점기의 시련 등을 겪으면서도 그 맥을 끈끈하게 잇고 있는 교구입니다.
선대의 정성과 믿음이 깃든 공간, 아산시교구
그 안에서 만나는 따뜻한 사람들과 삶의 이야기.
지금, 조용한 감동이 있는 곳으로 초대합니다.
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번영로 115번길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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