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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 서부지역 동학혁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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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웹마스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266회   작성일Date 11-09-08 15:47

    본문

    (교사교리연구 제 5호 - 포덕 141년 3월)

    표 영 삼

    머 리 말
    충청도 동학혁명운동은 대체로 6개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목천(木川), 천안, 전의(全義)지역을 비롯한 서북부지역과 청원, 음성, 충주, 괴산, 보은, 영동, 옥천, 진잠, 회덕을 망라한 동부지역, 예산, 당진, 아산, 홍성, 서산, 태안을 연결한 서부지역, 보령, 서천, 한산, 부여, 홍산(鴻山)을 연결한 서남부지역, 논산, 공주, 연기, 청양 등 중부지역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이 중 서부지역은 상암(湘菴) 박희인(朴熙寅)이 이끄는 덕포(德包)와 춘암(春菴 上師) 박인호(朴寅浩)가 이끄는 예포(禮包)가 주축이 되어 이끌어 냈다.
    서부지역에서 최초로 봉기한 것은 1894년 7월경부터이며 본격적으로 봉기한 것은 10월 1일이며 발화점은 서산과 태안이었다. 이후 관과 보수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각지 동학군들은 서난 운산면 여미벌(餘美坪)로 모여 수만에 이르는 대군을 만들었다. 그러자 일본군은 동학군을 공격하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출동하였다.
    10월 23일 일본군이 면천(沔川)에 당도했다는 급보를 받은 동학군은 당진읍 구룡리 승전곡(勝戰谷)으로 2만 병력을 이동시켜 계곡 양편 산 위에 배치하였다. 24일 정오가 지나자 일본군과 관군이 나타나 공격해 왔다. 동학군도 이들을 맞아 맹렬히 싸웠다. 계곡에 있던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군의 맹렬한 공격에 밀려 2시간 후부터 점점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개인장비까지 벌이고 면천 쪽으로 도주하였다. 동학혁명 기간 중 보기 드물게 일본군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대승을 거두었다.
    동학군은 여세를 몰아 추격하여 25일에는 신례원(新禮院)으로 진출하였다. 홍주 유회군 1천여 명은 동학군을 저지하기 위해 26일 새벽에 출동하여 아침 때에 기습하여 왔다. 동학군은 즉각 이들을 포위하고 섬멸하니 또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예산과 덕산으로 진출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고 10월 28일에는 대신사의 탄신기념일을 맞아 홍주성(洪州城) 공격에 나섰다.
    3만에 이르는 동학군은 홍주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일본군과 관군을 성안에 가두었다. 하오 7시경에는 조양문 앞 40m까지 진격하여 포격을 가하는 한편 수만 동학군으로 하여금 성곽을 기어오르도록 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우수한 화력으로 방어에 주력하면서 공격하여 오는 동학군을 여지없이 사살하였다. 불과 십여 분의 전투 끝에 동학군은 수백 명이나 희생되었다. 공격을 포기한 동학군은 원거리에서 포위망을 형성한 채 밤을 새우고 29일을 맞았다.
    묘책도 없었고 잠자리 마련도 어려웠고 식량 공급도 제대로 안되었다. 거기에다 부상자가 많아 동학군의 약점이 들어 나기 시작하였다. 계속 포위할 여력이 없었다. 오후가 되자 한 두 무리가 흩어지는가 싶더니 5시경에 이르자 전군이 뿔뿔이 흩어졌다. 동학군의 동정을 살피던 일본군과 관군은 후퇴하는 것을 확인하자 반격에 나섰다. 일본군과 관군이 추격전을 벌이자 순식간에 동학군은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충청 서부지역 동학군은 10월 29일에 수세에 몰리면서 도처에서 엄청난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해미성과 서산 매현에 집결하여 저항해 보았으나 일단 밀리기 시작하면서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도처에서 일본군과 관군, 그리고 유회군(儒會軍)은 동학군을 색출하여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홍주성 점령을 눈앞에 두었던 동학군은 12월에 이르면서 뿌리채 뽑히고 말았다.
    10월 20일 이후 전라도에서는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동학군이 공주를 공격하기 위해 노성 쪽으로 진군했였고, 김개남도 청주를 공격하기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1주일 만이라고 포위하고 있었다면 일본군과 관군의 병력을 공주로 집결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중요한 홍주성 공격을 실패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제 충청도 서부지역 동학혁명 과정을 간추려 살펴보기로 한다.
    1.원벌에서 최초의 봉기
    충청도 서부지역에 동학이 처음 들어 온 시기는 1880년경이라고 여겨진다. 1883년 6월에 간행된 경주판 동경대전 발문에 충청도 아산 도인 안교선(安敎善)이 공주 도인 윤상호와 같이 실무를 맡았다고 되어 있다. 경주판 {동경대전}은 공주접에서 자금을 마련하여 동협접(東峽接, 강원도)과 영남접이 힘을 모아 만든 것이다. 적어도 경주판 {동경대전}을 간행하는 데 호서 대표자로 안교선이 참여한 것은 이 지역에 상당한 도인들이 있었으며, 적지 않은 자금도 염출할 힘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1878년 11월 조에 선생수단소(先生修單所), 즉 {최선생문집도원기서} 간행업무를 추진할 때 안교일(安敎一), 안교상(安敎常), 안교백(安敎伯), 안교강(安敎綱) 등 안교선의 인척들이 실무에 참여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충청도 아산(牙山)지역에는 1878년경부터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도 하였음이 분명하다.
    {아산교보}에 의하면 온양면 용화리 334번지 이규호(李圭鎬, 1861) 부부는 1884년 11월 16일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천도교회사초고} 포덕 24년(癸未) 2월조에도 "… 박인호(朴寅浩), 안교선, 안익명(安益明), 윤상오(尹相五) … 등이 차례로 신사께 배알하였다"는 기사가 보이며 내포(內浦)와 공주지역 지도자들이 단양 남면 갈래골에 있는 신사를 찾아 왔다고 하였다. 내포(內浦) 일대에는 이미 상당수의 동학도인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내포지역에는 동학세력이 적었으나 1892년 말부터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즉 이 해 10월 하순에 공주에서 일어난 교조신원운동 다음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공주 교조신원운동은 신사의 명에 따라 10월 20일부터 천여 명 도인들이 공주의송소에 모여 21일에 단행되었다. 이 날 동학도들은 행렬을 갖추고 서인주와 서병학의 지휘에 따라 당당하게 공주 관아로 들어가 대신사의 신원을 소청했던 것이다.
    동학도 천여 명이 일시에 모여들자 깜짝 놀란 관원들은 어쩔 줄 몰랐으나 뜻밖에도 의관을 잦추고 질서정연하게 행동하자 비로소 안심하였다. 예를 갖추고 격식에 맞게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억울한 사연들을 기록한 의송단자(議送單子)를 올리니 시비를 논할 여지가 없었다.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은 의송단자를 받아 본 조병식은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이틀 뒤인 22일에 제음(題音)을 보내왔다. 그리고 24일에는 각읍 수령들에게 감결(甘結)을 시달하였다. 청원요지는 다음과 같다.

    무고한 백성들을 엄동설한에 내몰아 사경에 헤매게 하고 남편을 징역 보내어 어버이를 이별하고 길가에서 울부짖게 하니 무슨 죄가 있기에 이렇게 하는가. …  외읍에 수감되어 있는 여러 동학도 들을 모두 석방하여 달라. … 한편 임금에게 계달하여 스승님의 신원을 씻도록 해 달라.

    충청감사는 다만 나라에서 정한 동학금단조치는 자신의 권한 밖이라 하여 제외하고 여타 사항들은 동학도의 요구대로 감결을 하달했던 것이다. 동학도들은 조병갑의 신속한 조치에 대해 고맙게 여기고 차후 조치를 관망하기로 하고 24일에 해산하였다.
    공주 유생 이용규(李容珪)는 {시문기(時聞記)} 10월 26일자에 "동학도 천여 명이 금영(錦營) 아래에 모여 도를 행하려는 뜻으로 감히 조병식에게 정소(呈訴)했으며, (감사는) 제서를 엄히 내려 쫓아 보냈다"고 하였다. 당시 1천여 명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데 감사로부터 다짐까지 받아내자 동학을 주목하게 되었다. 더욱이 의관을 정제하고 언행을 삼가하며 질서 정연하게 행동하여 동학도들은 찐짜 도인답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더욱이 삼례와 광화문전 교조신원운동, 그리고 보은에서의 척왜양창의운동 등을 통해 들어 난 동학의 조직력과 높은 뜻을 알게 되면서 민중들은 동학에 몰려들었다. 이로부터 내포 일대에도 엄청난 인원이 동학에 몰려들게 되었다. {대교김씨가갑오피란록(大橋金氏家甲午避亂錄)}에 의하면 "소위 동학은 보은 도회 이후에 그 치열한 모습은 달이 다르고 때가 다르게 마을마다 접이 만들어져 사람마다 주문 읽는 기세가 타오르는 불길과 같았고 물결치는 조수와 같았다"고 하였다.
    이 지역의 동학은 "덕포의 박도일(朴道一, 寅浩·龍浩)과 예포의 박희인(朴熙寅, 德七), 목포(木包)의 이창구(李昌九), 아산포(牙山包)의 안교선(安敎善), 산천포(山川包)의 이동구(李東求) 대접주 또는 수접주 등이 이끌어 가고 있었다. 서산 사람 홍종식(洪鍾植)의 증언에도 "하층계급에서 불평으로 지내던 가난뱅이, 상놈, 백정, 종놈 등 온갖 하층계급들은 물 밀 듯이 다 들어와 버렸다."고 하였다. 1894년 5월경에는 내포 일대가 동학세력으로 뒤덮히다 싶이 엄청나게 퍼졌다.
    내포에서 동학혁명운동의 깃발을 처음 올린 곳은 운산면(雲山面) 원벌(元坪)이었다. 1894년 3월에 전라도에서 혁명의 깃발이 올려지자 이 소식을 들은 이 지역 동학도들은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龍賢里) 보현동(普賢洞)에 있는 이진사(李進士)를 응징하기 위해 통문을 돌려 약 3백 명이 원벌에 모였다. 이진사는 평소 동학도를 탄압했으며 소작관계로 마찰을 일으켜 민심을 잃었던 것 같다. 당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김윤식(金允植)은 4월 9일에 동학군 1백여 명이 원평 마을에 와서 자고 개심사(開心寺)로 넘어 가는 것을 보았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어제 동학도 백여 명이 원평 마을에 와서 자고 오늘 개심사로 향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개심사로 가는 동학도들이 끊이지 않았다. 알아보니 보현동 이진사가 평소 동학을 심하게 배척하여 동학도 들이 원한을 품고 개심사에 모여 회의한 후 그 집을 부수리라 한다. 내포에는 동학도가 매우 적었으나 지금은 가득 차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엄청나게 늘어났으니 이 역시 시운이라 매우 통탄스럽다.

    그 때 몸소 참여했던 서산 홍종식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즉 "제일차로 통문을 돌려 가지고 홍주 원벌(元坪)에 대회를 열게 되었다. 구름 모이듯 잘도 모여 순식간에 벌판을 덮다시피 몇 만 명 모였으며 이 소문은 이진사에 갔다. 우리는 개심사란 절로 이진을 하였다가 가니 이진사는 그만 전과를 사죄하고 죽기를 청하였다. 항자불사(降者不死)라고 우리는 그를 효유하여 놓아 보냈다"고 하였다.
    35년이 지난 1929년의 증언이므로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김윤식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인원수는 과장되었으나 사실은 믿을만 하다. 이 사건이 터진 다음 민중들은 더욱 동학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김윤식도 "내포에는 동학도가 적었으나 지금은 가득 차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하였다.
    4월 초순에 이런 일이 있은 다음 동학의 기세는 더욱 강성해 졌다. 덕산과 예산에 갔던 일본상인의 말에 의하면 5월 당시 덕산과 예산지역은 주민의 반수가 동학이었으며 매우 평판이 좋았다고 하였다. 즉 "덕산과 예산의 주민은 반수가 동학이지만 평상시와 같았다. 덕산 동두리(東頭里, 동머리)에서 숙박하였던 집주인은 김상립(金尙立)이라 하며 동학에서 약간 높은 지위에 있는 자였다. 또 예산에서 숙박하였던 집주인 권순근(權順根)도 역시 동학도였다. 동학은 집회하여 협의할 때 신호로 징을 때려 울렸다. 덕산과 예산의 동학 두목은 2∼3명인 것 같았으며 평판이 아주 좋았다"고 하였다.
    2. 10월 1일 서산관아 점령
    전라도에서 5월 초에 동학군이 관군과 화약하고 각지로 흩어지면서 6월 중순부터 군현에 동학 집강소를 설치하면서 자리잡아갔다. 그런데 1894년 6월 21일에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는 불집을 터뜰였다. 그들은 수구세력을 몰아 내고 김홍집 내각을 세워 이 나라를 마음대로 조정하였다. 동학군들은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적으로 격분하기 시작하였다. 7월 하순에는 여러 포(包)에서 일본군을 응징하자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내포 일대의 동학군들도 전라도와 마찬가지로 항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그리하여 동학 활동을 더욱 강화하여 도세를 확장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자 부민과 사족들은 불안해하였고 식량 조달에 협력을 강요하는 동시에 동학에 입도할 것을 권유하자 적지 않은 마찰이 일어났다. {대교김씨가갑오피란록}에 의하면 "날이 가고 때가 바뀔수록 경내에서 동비로부터 욕을 당하는 집(士族)이 십이면 팔 구는 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피해를 면해보고자 마지못해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도 있었고, 집을 빠져나가 피난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송산 이도정(李都正)가의 대소 여러 집들이 피난길에 나섰으며 어제는 공림댁 전 가족도 남부여대하고 피난길에 나섰다". 피란록을 집필한 필자인 김씨도 7월 23일에 피난길에 나섰다고 하였다.
    8월에 이르자 내포 일대의 유생들은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게 되었다. 이 때 예포 대접주 박희인은 예산군 삽교 북쪽 목시(木枾)에 도소를 세우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물론 덕산 대접주 박인호(朴寅浩)도 덕산에 도소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 때 호남 호서를 막론하고 전 동학군은 항일전 준비에 돌입하여 매우 격양되어 있엇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동학군을 효유하기 위해 9월 초에 대원군 명의로 효유문(曉諭文)을 시달하였다. 그리고 김홍집 내각은 일본군에게 동학군 토벌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일본군으로부터 승낙을 받은 김홍집 내각은 9월 22일(양 10월 20일)에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임명하고 순무영(巡撫營)을 창설하여 제군(諸軍)을 통솔하게 하여 동학군 토벌에 돌입하였다. 한편 각 고을에 민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초멸하도록 부추기었다.
    내포 일대의 군현 수령들과 유생들은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고무되어 동학군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서산군수 박정기(朴錠基)와 태안군수 신백희(申伯禧)와 태안 방어사 김경제(金景濟)는 동학군들을 강제로 귀화시키기 위해 압력을 행사하였으며 동학을 원천적으로 뿌리 뽑고자 지도급 인사들을 모두 체포하여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서산과 태안, goal지역에서 활동하는 30여 명의 접주와 간부들을 체포하여 수감하였다. 그리고 10월 1일에 서산관아에서 모두 처형하기로 하였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예포와 덕포 관내 동학지도자들은 비상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덕포와 예포 대접주는 9월 15일경에 보은 대도소로 달려가 하루 빨리 기포하여 이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동학군이 기포하여 악질 관헌을 처단하지 않으면 동학도들은 모두 죽게ㅗ디었다고 아뢴 것이다. 조석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본 군수는 신백희(申伯禧, 百熙)요, 태안 방어사는 김경제(金景濟, 慶濟)라 위명(爲名)인인데 본시 태안인으로 부(付) 정부하여 태안 방어사를 자원 하래하여 9월 일에 태안 군수 신백희 등으로 일심 합력하고 해서태(海 瑞 泰) 동학교도를 일체로 귀화할 적정(的定)이러라. 약 불연인즉 두목을 다수 참살하면 어찌 진압하지 못하랴 주의(主意)하고 병정과 관군을 처처로 분분이 발송하여 기 중의 대두목으로 만 30여 인을 차 등지 괴수라고 착래(捉來), 엄형 옥수(獄囚)하니라. 기 시에 유독 해서태(海·瑞·泰) 포중이 여시 흉흉 망조하므로 교도 6∼7인이 주야로 역주 예산군 본포에 내도하여 3읍 관내에 전후 사실이며 접중 위난이 만만 시급이라고 일일 고달하니라. 기 시에 차(且) 홍주군수 이승우(李勝宇)도 방금 토포사(討捕使)로 (부임하여) 유회를 만방으로 모집하며 병정과 관군을 다수 합세가 되어 오교를 금명간 공격지책으로 일심 단결을 하와 적세가 거대 여운이라.

    당시 충청도 동학지도자들은 똑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대도소로 달려오게 된 두목이 한 둘이 아니었다. 결국 동학지도부는 승패를 떠나 항일전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 때 전라도에서는 동하군의 병력을 보강하고 군량미를 모아 북상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9월 18일(양 10월 16일) 신사는 드디어 왜놈을 물리치기 위해 기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황해도 해주 접주들과 같이 보은에 왔던 팔봉접주 백범(白凡 金九)은 "호랑이가 물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지" 하며 신사가 결연한 자세로 기포령을 내렸다고 증언 하였다. 기포령이 떨어지자 여러 두목들은 각기 자기 관내로 급히 돌아갔다.  덕산 대접주와 예산 대접주도 관내로 돌아와 접주들을 불러모아 여러 가지 조치를 지시하였다. 즉 법소에서 정식 통문이 당도할 것이니 접으로 돌아가 기다렸다가 철성(징)을 울리면 즉시 응성(應聲)하고 도인들은 각 포에 모이도록 하여 체수(體囚)되어 있는 두목들을 구출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고 하였다.
    드디어 9월 28일 늦게 법소(法所)로부터 훈시문이 당도하였다. "팔로의 우리 도인들은 죄가 없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일이 잘못되면 모두 살해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글이 당도하면 재빨리 기포하여 스스로 살 길을 찾으라"는 내용이었다. 예포와 덕포는 29일에 철성(鐵聲)을 울리게 되었고 각 접에서는 일변 응성하고 일변 기포하여 서산관아를 향해 모여들었다.
    10월 1일 아침 동이 틀 무렵, 서산관아를 에워싼 수천 동학군들은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관아로 쳐들어갔다. 우선 수감된 두목들을 전원 구출하고 군수들을 잡아 결박하고 타살하는 한편 악질 관리들을 색출하여 엄히 다스렸다. 문장준과 조석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문장준 역사>
    본포(本包)에서 징을 울리자 기성을 청하고 일번으로 응성하며, 일제히 우리 포 관내는 일시에 전광과 같이 회집하며 일편으로 각처 수(囚)하온 두목을 구출하기로 약속하니  9월 그믐이라. ... 급보를 접한 접주 장성국(張聖國)은 이북면(梨北面) 포지리(浦芝里)에서 밤에 횃불을 들고 10리 갯벌을 달려 원북면(遠北面) 방갈리(防葛里) 접주 문장로(文章魯) 집까지 와서 사방에 치보(馳報)하여 모인 교도들은 접주 장성국·문장로·金君執·崔孟春. 接司 曺應七·文在錫·文龜錫. 都執 文章俊·李廣宇이하 文章權·文俊甫·文聖烈·姜仁成·安仁默·安玄默·金成七·金公必·姜雲在·金可烈·文章儀 외 수십 명이 회집한 중 李致奉으로 北部隊長, 安玄默으로 旗手隊長을 정하고 기치를 들고 행진하니 각처 도인이 합세, 수백 인이 일차로 태안읍으로 운집하니 기 익일은 10월 1일이라. 측 안무사와 서태(瑞·泰) 양 군수, 민권옹호지 기하(旗下)에 엄수할 제 두령을 일제 참살할 지경을 관하고 불기이회(不期而會)로 도중 수백 만인이 집합하여 민권의 대세를 대파하고 일변으로 수옥를 방환(放還)하였더라.    

    <창산후인조석헌역사>
    익일은 즉 10월 1일이라. 평명에 소위 안무사와 서·태 군수가 착수(捉囚)한 동학 두목 30여 인을 일체로 장대에 착입 궤좌(捉入 座) 후 좌우로 무사와 역졸을 나열하고 방재(方在) 참살지제러라. 차경(此境)을 문하고 일반 교도가 풍운과 여히 수수만 명이 집합하니 기 대세가 불가성언이라. 돌입 관정하야 일편으로난 안무사와 서·태 군수를 일체로 박지타지(縛之打之)하야 당석에 타살하고 일편으로 동학 두목 30여 인을 해구(解救) 출생이러라.

    아마도 태안군수와 안무사가 서산관아에 모여 10월 1일에 30명에 이르는 동학두목을 처형하려 했던 것 같다. 격분한 동학도들은 함성을 지르며 관아로 달려들어가 서산군수와 안무사와 태안군수를 차례로 묶어 타살하고 감옥에 있던 두목을 구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관속들의 집을 찾아내어 부수었고 악질 관리 몇 명도 처단한 것으로 보인다.
    홍종식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히 서산읍으로 모이라는 것입니다. 모이되 농기와 농악을 가지고, 총이 있으면 총을 가지고, 칼 있으면 칼을 가지고, 총칼이 없으면 죽창이라도 깎아들고, 바랑에는 사흘 먹을 음식을 해 지고 의복은 튼튼히 입고 오라 하였습니다. … 군수는 목을 베어 쑥국대에 매어 달고 관아와 관속들의 집들은 불을 놓아 온 거리가 쓸쓸한 연기 속에 잠겼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장준의 기록에도 "수옥 되었던 여러 사람을 석방했다"고 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0월 초1일 자시에 비류 수천 명이 성중으로 돌입하여 동헌과 공해를 부수었다. 사도는 그들에게 살해당했으며 인부도 탈취되었다. 이방 송봉훈(宋鳳勳)도 곧 타살 당했다. 호적을 비롯 각종 공문서는 불질러버렸고 곳간을 부수고 군기와 공납전을 탈취해 갔다. 이방과 교졸의 가옥들도 남김 없이 부셔버렸다. 한 달간 읍에 머물면서 인민을 살해하며 때로는 다른 고을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도 했다.

    호적을 비롯하여 각종 공문서를 불살랐다는 것은 신분제 기록을 없애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은 창도된 이래 줄 곳 양반 상놈의 신분제를 타파하기 위해 꾸준히 활동하여 왔다. 특히 동학혁명 기간 중에 제일 먼저 내 세운 것이 신분제 타파였으므로 호적을 불사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자리를 잡은 동학군들은 1개월간 이 곳에 머물면서 동학세력을 더욱 키워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서산관아를 점령 후 며칠 뒤에는 해미성(海美城)으로 달려가 무기를 빼았았다. 이 때 다른 지역의 여러 군현에서도 동학군들이 기포하여 군현의 관아를 장악하고 무기를 손에 넣었다. 아산군수는 "10월 5일 사경(巳時)에 덕산포라 칭하는 동학도 수천 명이 총기를 갖고 방포하며 읍에 돌입, 공관을 부수고 관리를 협박하여 군기고에서 병기를 약탈했으며 민가의 재산도 약탈했다. 이튿날 아침에 신창으로 떠나 지루동(地樓洞)에 둔취했다. 후에 들으니 대진을 발동하여 당진과 내포로 갔다"고 하였다. 덕포의 대접주인 박인호는 아산, 신창, 예산, 당진, 면천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10월 25일자 김윤식이 일본공사에게 보낸 글에 보면 내포 일대가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공격하여 달라고 하였다. 즉 "내포의 적 이창구(李昌九)는 많은 적도들을 옹호하고 숭학산(崇鶴山)의 민보를 탈취하였으므로 내포의 열읍들이 모두 그 해독을 입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포로 말하면 곡물를 생산하는 곳이며 겨울과 봄 사이에 경성으로 식량을 공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적도들이 이 곳에 주재하자 조운(漕運)이 불통되고 있습니다. 숭학보(崇鶴堡)는 비록 수원에 속하지만 한 여울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므로 만일 경병으로 공격하면 단번에 섬멸되어 남은 사람들도 다 해산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동학군 측에서도 내포를 장악하는 것은 곧 식량을 확보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 일대를 장악하는 데 우선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동학군은 초장에 이 일대를 장악하였다. 10월 7∼8일 경에는 중요한 지점에 거의 동학도소를 설치하고 준행정권과 준사법권을 행사하였다. 한편 민중들은 앞다투어 동학에 몰려들었고 포의 조직은 점점 강화되었다.
    그러나 많은 신참 도인이 들어오자 통제력이 해이해져서 기율을 잡아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심하면 남의 전곡을 탈취하는가 하면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불법행위도 자주 일어났다. 이로 인해 동학군은 오명을 쓰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전라도에서도 초기에는 이와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없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자리잡게 되었다. {창산후인조석헌역사}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목소(木巢, 木枾) 대도회소에서는 10여일 사무에 오도 운수가 이미 열린 때라(已開之時), 고로 이 세상의 운(斯世之運)이 세상과 더불어 같이 돌아오는지라(與世同歸) 세속 사람(物外之人)과 모산지배(模散之輩) 수천이 오도에 신입하여 수도할 마음은 만에 하나도 없고 다만 불법행위를 일 삼으니 늑봉사채(勒捧私債)와 늑굴인총(勒堀人塚)이며 심지어 말과 곡식을 차지하는(執馬執穀) 것으로만 위주하니 이를 어찌 양민의 사람 종자라 하겠는가"라고 통탄하였다.
    3. 승전곡서 일본군 격퇴
    충청도 서부지역을 동학도에게 장악 당하자 정부와 일본군은 동학토벌작전을 미룰 수가 없었다. 군대를 파견하여 10월 10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토벌에 들어갔다. 충청도 서부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은 홍주성을 거점으로 각 군 현의 병력을 집결시키는 한편 유회군을 조직케 하고 일본군을 출동시켰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예포의 거점인 목시에 있는 도소를 습격하였다. 목시는 예산 삽교읍에서 북쪽에 있는 들판 작은 마을이다. {창산후인조석헌역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 11일 미명에 홍주군수 이승우(李勝宇)가 일병 3백 명과 병정 수백 명이며 유회군 수천 명을 솔하고 목시 대도소 대진을 공격이어늘 피차 상전하기를 지 2∼3시간토록 접전하다가 교도가 선위 대패하야 산지사방하오매 피배 승승장구하야 대도소 사무실까지 돌입 동리하여 당처마다 몰수 충화하여서 난 막지교도 후세 고로 즉위 퇴거러라. … 교도난 수수만 명이로되 군율이 미성하고 용병이 미달지고나 대전 2∼3시간에 교인은 일인도 상해사망이 무하였으나 피배는 살육이 2명이오 중상이 3명이라 하더라.

    10월 11일에 일본군 3백 명이 공격해 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이 공격에는 홍주 수성군과 유회군이 출동한 것으로 보인다. 대접주 박희인은 목시에서 패한 것은 수성군에 비해 동학군은 전혀 전투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된 박희인 대접주는 각지 접주들에게 우수한 포수를 물색하게 하였고 10월 15일(양 11월 12일)에 이르자 30여 명의 포수가 모이자 이들과 같이 4명의 두령급 접주를 대동하고 태안으로 갔다.

    일반교도의 소원이 이 때를 맞아서난 충남 동도를 한 곳에다 회집 다시 세워(更立) 후회가 무케하자 하오나 천사만념하여도 좌우가 난편(難便)이로대 부득이 욕파불능(欲罷不能)이라. 동 15일에 포군 30명과 두령 3∼4원을 솔하고 즉입 해서태(海瑞泰) 동도진하야 전후 사실을 설유하고 대회 일진을 통히 합세하니 50만 무리가 이루었더라.

    일본군과 경군이 출동하여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덕포와 예포 및 아산의 안교선 대접주는 태안에 모여 대책을 협의하게 되었다. 이 때에 전라도의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을 비롯하여 북접의 손의암 성사도 출동하여 공주와 청주성 공략에 나서기로 하고 북상하고 있었다. 충청 서부지역 동학군들도 이에 발맞추어 움직이기로 하고 일단 서산 운천면 여미벌(餘美坪)에 전동학군을 집결시키기로 하였다. 신창 아산을 위시하여 내포 일대의 동학군은 이 곳으로 집결하였다.
    10월 18일경부터 여미벌 일대에는 수만의 초막이 세워졌고 태안과 서산 동학군들도 23일에 출동하여 24일에 여미 현지에 당도하였다. {창산후인조석헌역사}에는 "23일에 해미군 귀밀리(貴密里)에서 유진 숙소한 후 익일 24일에 행군하여 대진이 하오 신시량(申時量)에 해미를 지나" 여미벌에 당도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장준역사}에도 "23일에 이진 어 해미하고 동 24일에 이둔 여미려니"라 하였다. 근 2만에 이르는 동학군은 각지에서 관아를 점령하고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해미성에서 탈취한 대포도 수십 문이나 끌고 왔다. 이 때 모인 접주급 이상의 두목들은 다음과 같다.

    △ 新昌: 金敬三 郭玩 丁泰榮 李信敎, △ 德山: 朴寅浩 李君子, △ 德山 東面: 金蓂培 李鍾皐 崔秉憲 崔東信 李鎭海 高雲鶴 高壽仁, △ 唐津: 朴瑢台 金顯玖, △ 瑞山: 張世憲 張世源 崔兢淳 張世華 崔東彬 安載衡 安載德 安載鳳 朴麟和 洪七鳳 崔英植 洪鍾植 金聖德 朴東鉉 張熙,  △ 泰安: 金秉斗, △ 洪州: 金周烈 韓圭夏 韓圭復 黃雲瑞 金陽和 崔俊模, △ 禮山: 朴熙寅, △ 沔川: 李昌九 韓明淳, △ 安眠島: 朱炳道 金聖根 金相集 賈榮魯, △ 海美: 朴聖章 金義亨 李龍儀 李鍾甫,
    △ 朴允一 玉出崑 文學俊 李炳浩 金樂蓮
    △ 沔川: 李化三, △ 洪城: 金永弼, △ 結城: 千大哲, △ 牙山: 安敎善,

    동학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일본군은 10월 23일(양 11월 20일)에 "여미의 부근 고지와 해미성에서 동학군의 공격을 받아 사력을 다해 방어 중이라"는 관군의 연락을 받고 아까마쯔(赤松國封) 소위 휘하 1개 소대와 1개 분대를 출동시켰다. 일본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은 동학군은 만전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지형이 유리한 승전곡(勝戰谷)으로 이동하였다.
    승전곡은 당진군 당진읍 구룡리 동쪽과 면천면 사기소리(沙器所里) 서쪽에 걸쳐 약 3km 정도의 좁은 계곡을 이룬 곳이다. 계곡의 북쪽에는 이배산(離背山, 220m)이, 남쪽에는 웅산(雄山, 253m)이 솟아 있어 깊고 좁으며 꼬불꼬불하게 난 계곡 길을 굽어보고 있다. 이 능선 양쪽에 각각 1만명의 동학군을 배치하고 일본군이 오기만을 대기하고 있었다.
    24일 면천읍에서 아침에 출발한 일본군은 오전 10시경에 나무고개를 넘어 사기소로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 곳을 지키던 동학군 일부는 일본군이 사격하자 후퇴하여 낮은 능선에 배치된 동학군과 합류하였다. 일본군은 계곡에 당도하자 1개 분대를 이 능선으로 올라가게 하고 주력부대는 계속 골짜기를 따라 전진해 왔다. 사기소리에서 구룡리 쪽으로 오다보면 왼편에 길고 낮은 능선이 가로 놓여 있다. 여기에 동학군 일부가 배치되어 정면에서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발포하였다. 일본군은 이 곳을 접령하면 길이 열릴 것으로 보고 공격하여 왔다. 동학군과 일본군은 이 곳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얼마 후 동학군은 후퇴하여 좌측에 있는 웅산으로 올라가 다른 동학군과 합류하였다. 일본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승전곡 부근 전투상보(1894年 11月 21日) 요지
    1). 11월 15일(양) 진위(振威)를 출발, 1개 소대와 2개 분대(필자주, 약 89명)는 한국병사 34명과 같이 행군했다.
    2). 11월 21일(음 10월 24일) 아침에 … 모든 병사의 배낭을 말에 싣고 면천을 떠나 여미읍을 향해 전진했다.
    3). 오전 10시경에 총소리를 듣고 제3분대를 승전곡 서쪽 고지로 보내 수색케 하고 지대는 전진했다.
    4). 전방 1.500m 벌판에 10여 명의 동학군을 발견하고 계속 전진, 승전곡 좁은 골짜기 서쪽 고지에 이르렀다. 500m 전방 밭에 4∼5백 명의 동학도가 깃발을 날리며 있었다. 일제히 사격하자 흩어졌다. 11시 30분경 그 곳에 전진하여 점심을 먹었다.
    5). 12시 30분 한국병사 34명을 서쪽 산길로 전진시키고 제2, 제3, 제4분대 27명을 오른쪽 산길에 배치하고 나머지를 본대로 삼아 계곡 길로 전진시켰다. 이 때 전방 양 고지 일대에 1만 5천여 명이 깃발을 날리며 방어하고 있었다. 1개 분대로 오른쪽을 경계토록 하고 본대(2개 분대 반)는 흩어져 6백m 앞으로 전진했다.
    6). 하오 3시 30분에 오른쪽 산길로 전진하던 한국병사가 퇴각해 왔다. 산상에서 수천 명 적군이 사격하는 동시에 서풍을 이용하여 산에 불을 지르니 그 연기와 불길로 퇴각했다 한다. 오후 4시 전군을 후퇴시키자 적의 반격은 맹렬했다. 본대는 오른쪽 시내를 따라 후퇴하며 승전곡의 좁은 곳을 일퇴일지(一退一止) 하며 빠져 나와 면천까지 퇴각했다. 어찌할 방도가 없어 퇴각을 속행하여 오후  10시 덕산으로 들어왔다. 22일에는 홍주로 퇴각했다.
    7). 그리고 퇴각할 때 유실한 물품은 78명분의 배랑, 상하 겨울 내의, 밥통, 구두, 그리고 쌀자루와 휴대식량 312식 분이었다. 적도 전사자 3명, 부상자 미상이며 소비탄약은 612발이었다.

    홍종식과 조석헌역사에도 승전곡 전투에서 일본군이 대패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으나 전후상황이 자세치 않다. 조석헌은 동학군이 승전곡을 지날 무렵 일병 4백 명과 한병 5백 명 그리고 유회군 수천 명이 중로에 복병했다가 돌출하여 전투가 벌어지자 일한병 십여 명이 중상하자 대패 도주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일본측 기록과 큰 차이를 보인다. {대교김씨가갑오년피란록}에는 이날 친척들과 뒷산에 올라가 전투광경을 바라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병정들이 출전 모습을 보고자 친척들과 뒷산 봉우리에 올라갔다. 바라보니 오늘 미명에 이미 여미로 출발했다 한다. 종일 포향이 끊이지 않았으며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어 살기가 가득하고 햇빛도 어두웠다. 나는 승전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랬다. 오후에 쌀을 지고 읍에 갔던 사람이 돌아왔다. 이르기를 여미로 출병했던 병정들이 승전곡에 당도하여 겨우 일진을 돌파하고 검악 후봉에 이르렀으나 누만 명 대진이 나타나자 기가 질려 총 한방 못 쏘고 즉각 퇴병했다 한다. ... 얼마간 지나자 승전곡 기슭에서 포성과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화염이 골짜기를 메웠다. 만여 명 비류가 산과 들을 짓밟으며 면천읍으로 달려 들어갔다.

    산상에 포진하고 있던 2만여 동학군과 계곡으로 공격해 들어오던 80여명 정도의 일본군은 12시 반부터 3시 반까지 약 3시간에 걸쳐 공격을 시도하였다. 일본군의 전투상황 보고에서 보듯이 이 전투는 동학군이 지략에 의해 일본군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압했던 전투였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동학군을 깔보고 좁고 깊은 계곡 길을 따라 공격하여 왔다. 계곡 아래 능선에 있던 동학군은 물리칠 수 있었으나 산상에 배치된 동학군을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 부득이 일본군은 집중 공격을 받고 개인 장비를 버린채 면천읍으로 후퇴하였다. 동학군이 맹렬하게 추격하자 다시 합덕으로 갔다가 26일(양 22일)에 홍주성으로 후퇴하였다.
    동학군은 25일에 기세 당당하게 예산군 고덕면(古德面) 구만리(九萬里, 구만포)까지 진출하였다. 이 날 저녁에는 신례원(新禮院)으로 진출하여 뒤에 있는 들판에 포진하였다. 당시 동학군은 볏짚으로 초막을 만들어 잠자리로 삼았는데 약 5리에 걸쳐 동학군 초막이 세워졌었다. 11월 5일 이 곳을 지나던 이두황(李斗璜)은 "수리에 걸쳐 볏짚이 깔려 있고 곳곳에 불탄 자국이 널려 있어 행적이 낭자했다. 토민을 불러 물어보니 지난 달 26일에 비류 수만 명이 이 곳에 와 주둔했다"고 하였다.    
    {천도교회사 초고}에 의하면 신례원에 모인 동학군은 약 5만명이라 했으나 3만 명은 되었다고 본다. 승전곡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각지 동학군들은 앞다투어 신례원으로 달려와 이렇게 늘어난 것이다. 25일 밤 이 곳에 당도한 동학군은 앞으로의 대책을 협의하였다. 한쪽은 신사가 있는 청산으로 가서 합류하자고 하였고, 한쪽은 이 곳을 떠나면 남은 가족들이 학살당한다고 하였다. 청산으로 가자는 쪽과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갈라졌다. 양분된 의견을 조정하지 못하면 큰 혼란이 일어날 지경에 이르렀다. {창상후인조석헌역사}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기록하였다.

    25일 예산군 금평면 신례원 후평에서 유진 숙소할 시에 ... 충남 접포중이 모두 여기 모였으니 명일에 법소로 가서 장석(신사)의 분부를 봉승하야 잘 조처하리라"고 군령을 진중에 설유하고 유진하였더라. ... 도인 2∼3인을 솔하고 심야토록 일진을 순회할 시에 지나다 들으니 하허 접중에서 상론하되 "예포 대접주가 하령하기를 명일에 솔 대진하고 법소에 입거하기로 작정하니 차진이 만일 10일만 충남 등지에 무한 경우에 충남 도가(道家) 노약은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명일 조조에 우리가 선위 주장하고 진중에 호령하되 부모처자를 생각하는 도인은 노하로 회하고, 불고 부모처자난 자는 부동하라 하자"고 약속을 정하는 것을 들으니 등골에 땀이 나더라. 종야토록 전전불매하고 명조에 갱정 규모하기로 생각하다.

    이러한 의견대립은 26일 아침이 되자 유회군이 습격으로 전투가 벌어지면서 말끔이 사라지고 말았다. 홍주목사 이승우는 이 날 홍주의 민병을 주축으로 하여 3천여 명을 출동시켜 동학군을 선제 공격하게 하였다. 동학군이 신례원에 진출하자 예산·대흥·홍주 세 고을 의려(義旅)들과 토병을 동원하여 공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학군의 반격을 받고 대패하여 도주하고 말았다. {창산후인조석헌역사}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기록하였다.

    26일 미명에 홍주군수 이승우는 유회장두 김덕경(金德景, 德卿) 등 10여 인으로 수십 군 토병과 유회군 사오천 명을 파송하여 예산 신례원 전 빙현(氷峴, 얼음재) 상봉에다 대진을 설하고 교진(동학)을 향하여 사격할 새 대포 수십 수로 일시에 몰(沒) 방을 빼여 엄살코자 하되 아무리 군률은 무하나 백여 만 대진이요 겸하여 10여 군의 군기를 모았으며 어찌 작은 것으로 큰 적을 대하리오. 양진의 대전장은 반일에 피 적당 일등 장두 6∼7인과 적군 7∼8백 명이 모두 몰사 소멸하니 기타 후응군 5∼6천명 피배 등은 공격하지 못하고 자패하여 각기 해산 도주하더라".

    신례원 남쪽에 있는 빙현(氷峴) 상봉까지 진출한 유회군은 이 날 새벽에 대포로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놀란 동학군은 멈칫했으나 불과 3천명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2만 동학군은 유회군을 겹겹이 포위하고 집중 공격하니 백여 명이 쓸어졌다. 훈련받지 못한 농민들로 구성된 유회군은 겁에 질려 패주하여 사방으로 훝어지고 말았다. 뒤따라 지원하려 왔던 일본군도 관군이 무너지자 저항할 생각을 포기한 채 홍성으로 후퇴하였다. 일본측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어제 (11월) 23일(음 10월 26일) 오전 6시 예산과 신례원에 동학도가 모여 있다는 것을 듣고, 홍주의 민병 약 1,000여 명이 이를 격퇴할 목적으로 먼저 떠난다고 우리 소대에 알려왔다. 그래서 곧 저녁밥을 준비, 출발하여 역리의 고지에 이르렀다. 이 때 선발했던 민병이 포위 당해 패해서 퇴각하고 있었다. 적병 2만은 고지를 점거하고 그밖에 5천 명 쯤은 중앙의 밭에 위치해서 점차 예산을 향해 행진하려는 상황이었다. 적군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 한국병사 30명이 따라오기는 하나 겁을 먹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관군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동학군은 예산으로 진입, 관아를 습격한 다음 삽교(삽다리)쪽으로 옮겨가 이 일대를 점령하고 유숙하였다. {양호우선봉일기} 11월 6일조에는 덕산 삽교천 변에 이르러서 보니 "짚푸라기가 연달아 깔려 있고 빈 벳섬도 널려있었다. 불을 피운 자국과 밥 지은 흔적이 수리에 걸쳐 있었다"고 하였다.
    {창산후인조석헌역사}에는 "27일 오후에 발진하여 동군(德山) 역촌 뒷들에서 유숙하고 익일은 즉 28일 대신사주 탄신기도일이라 역촌 후현에서 기도하고 즉발 홍주군"이라 하였다. 연전연승한 동학군은 27일 저녁에 덕산에 진출하여 작전회의를 갖고 홍주성 공격을 결행하기로 하였다.
    동학군측에서 홍주성 공격을 서두르는 것은 첫째로 연전연승으로 동학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있고, 3만에 이르는 대군을 갖추었을 때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홍주성만 점령하면 충청서부지역에 대한 준행정권과 준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무기와 식량 조달이 쉬워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셋째는 홍주성을 점령하면 동학혁명운동의 대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보면 만일 홍주성을 동학군에게 빼앗기면 공주와 청주를 공격하는 동학군에게 사기를 진작시킴은 물론, 일본군의 병력을 분산해야 하는 한편 그만큼 동학군의 전투력을 길러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일본군과 관군도 이런 점을 생각하여 홍주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사수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28일 즉 이 날은 대신사(大神師 水雲 崔濟愚)의 탄신 70주년 기념일이라 탄신기도식을 마친 후 점심을 먹고 서서히 홍주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삽교에서 홍주성까지는 10km 정도로 오후 1시에 출발한 동학군은 오후 4시경에 성 외각에 당도하였다. 포위전에 돌입하여 산과 들을 메우고 대공세를 준비하였다.
    밀려오는 동학군을 지켜보던 일본군과 관군은 서문 밖에 포진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엄청난 기세에 눌려 몇 차례 교전해 보다가 모두 성안으로 철수하여 방어에 주력하였다. 동학군은 저녁 때가 되자 성 밖에 짚단을 쌓아 기어오르기 쉽게 만들었다. 그리고 조양문 밖에는 대포를 설치하고 공격준비를 마쳤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전투상황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홍주부근 전투상보(1894年 11月 25日)
    곧 홍주성에서 제2·제4분대를 동·북문에 배치하고, 제3분대와 제3소대의 제1분대는 서문 앞에서 빙고(氷庫) 능선에 걸쳐 배치했으며, 제5분대는 北門 왼쪽에, 제3소대의 제2분대는 서·남문 중앙으로 산재하게 하였다. 빙고 능선의 우리 군 퇴각을 엄호하도록 명령했다. 또 제1분대를 응원부대로 하여 남문 뒤쪽 약 3백m의 거리를 두고 적의 내습을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 한국 병사를 8명씩 나누어 각 문의 일본 병사 사이에 섞어 배치했다. 오후 4시 적은 덕산가도로 통하는 왼쪽 고지의 진지를 점령했다. 오후 4시 25분 적의 한 부대는 빙고 능선을 향해 전진해 왔다. 4백m 전방에 있는 수확이 끝난 논으로 접근해 오자 언덕 위에 있던 우리 군은 몇 번 일제사격을 퍼부어 적 수명을 쓰러뜨렸다. 적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자기편의 인원이 많은 것을 믿고 끝내 빙고 능선까지 전진해 왔다. 중과부적으로 언덕 위에 있던 분대는 퇴각하여 서문의 오른쪽과 왼쪽에 의지해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저격했다. 이 때 제5분대는 덕산가도로 통하는 서쪽 북문 앞 가까운 고지에 있는 적을 향해 일제사격을 세 번이나 가했다.(거리 8백m) 적은 이 사격에 놀라 두 대로 갈라져 도로 동쪽 고지 숲 속에 진을 쳤다. 북문에 배치했던 홍주병이 대포 2발을 발사했으며 그 거리는 3백m이다. 흩어져 숲 속으로 들어갔던 적은 갈라졌던 두 대열을 합쳤다. 제2분대가 이 때 또 일제사격을 가해 적의 기세를 꺾어놓았다.

    홍주성의 공방전은 일차로 성 밖에서 시작하였다. 동학군은 먼저 홍주성 서쪽에 있는 빙고 능선에 배치되어 있는 일본군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몇 명이 쓰러졌으나 계속 공격하자 일본군은 이곳을 내주고 성안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홍주성 북쪽 일대의 능선도 동학군이 공격하여 완전히 장악하였다. 초전에 일본군을 압박하는 데 일단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으로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고 있는 일본군과 관군을 공격하기 위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동학군은 향교 유생 7명을 처단하고 여기에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성을 공격할 대책을 협의하였다. 동학군의 화력은 유효 거리가 30m 정도였으므로 포위작전으로 적을 제압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희생자가 나더라도 공격전을 펴는 길밖에 없었다. {창산후인조석헌역사}에는 "북문 밖 향교촌 후현(後峴) 등지에 유진하고 욕파(欲罷) 홍주성문하고 요지 처에다 대포 수천 개수와 단총 수만 개를 일시로 발격 공지하되 요지부동이라"고 하였다. 대포가 수천 수라 했으나 과장이고 2∼3십 문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이 대포로 맹렬히 공격해 보았으나 성문을 부수지는 못하였다.
    차상찬(車相瓚)은 잡지 {개벽}에 "부득이 수만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박덕칠은 동문을 파하기로 하고, 일반 결사대는 인가에서 누만속(累萬束)의 고초를 가져다 성외에 적치하고 성을 월하여 격(擊)하려고 결의했다"하였다. 결사대는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동문을 공격하고, 한 부대는 성을 넘기로 하였다. 저녁 7시경에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일제히 성을 향해 돌진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성 밑에 쌓아올린 볏짚더미에 불을 질렀으며 기어오르던 동학군은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불빛이 환해져 조준하기가 쉬워지자 일본군은 일제히 사격을 가해 많은 동학군이 쓰러졌다.
    조양문을 공격해 들어가던 결사대도 40m 지점까지 접근하여 대포로 공격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성문이 견고하여 포탄을 맞았으나 까딱없었다. 얼마 후 일본군은 민가에 불을 질러 대낮 같이 밝히고 노출된 동학군 수 백 명을 쓰러뜨렸다. 제아무리 용감한 동학군이라도 수 백 명이 전사하자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4시 반부터 시작한 공방전은 저녁 8시까지 계속되다가 동학군은 지쳐서 물러서고 말았다. {창산후인조석헌역사}에는 공격하던 동학군은 "부득이 해자시(亥子時, 9시부터 12시까지)에 환퇴 산귀(散歸)하였더라"고 하였다. 일본군 기록에는 좀더 자세히 나와 있다.

    적의 한 부대가 동문 전방 약 6백m에 있는 숲 속으로 들어가 서서히 전진해 왔다. 그리고 민가에 불을 지르고 연기와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이용하여 성밖 1백m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연달아 맹격해 오므로 응원대를 동문으로 증파하여 응전시켰다. 적은 야음을 이용하여 대포를 동문 앞 40m 지점에 끌고 와, 동문을 마구 쏘았다. 우리 군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오후 7시 30분 총소리가 거의 멈추었다. 우리 군과 홍주 민병은 성벽에 의지해서 밤을 새워 경계했다.

    10원 28일(양 11월 25일)의 홍주성 공격은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채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군의 희생자는 결사대에 참가했던 주동 인물들이었다. 일본기록에는 "여기서 적을 격퇴, 적 수천 명을 살상하고 그 거괴 이창구(서산 사람), 이군자(李君子, 예산 면천의 거괴) 2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창구가 전 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쟁쟁한 접주들과 젊고 날랜 동학군들이 수백 명 몰살당했으니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29일(양 11월 26일)에는 날씨마저 흐렸으며 동학군은 사정거리를 벗어나 원거리에서 포위하고 대포만 쏘아 댔다. 일본군과 관군은 유인작전인 줄 알고 성문을 한발도 나서지 않은채 동학군의 동태만 살피고 있었다.  
    이 때 동학군 쪽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잠자리가 없어 추위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얇은 의복으로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수만 명을 먹일 수 있는 식량이 확보되지 않았으며 식사공급체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굶는 인원이 많았다. 한편 많은 사상자를 처리할 대책도 없었다.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으며 공격할 의욕마저 상실한 형편이었다. 결국 동학군은 스스로 홍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홍종식은 "실상은 홍주서 관군과 싸워서 패한 것이 아닙니다. 관군들은 홍주성을 튼튼히 닫고 지구전을 하기로 하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오래 대항하기가 어려워 자퇴하야써 헤어진 것입니다" 고 하였다. 29일 오후부터 일부 동학군은 소리 없이 흩어지기 시작하다가 오후에는 모두 떠나버렸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11월 26일(양) 적은 세 방면에 엄호병을 남기고 약 1,500m 되는 응봉고지로 퇴각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오후 4시 30분 패잔병을 응봉으로 모아(빙고 언덕은 제외)퇴각했다. 오후 5시 빙고 언덕의 적도는 해미방면으로 퇴각했다. 그래서 1개 분대(홍주병)를 내 보내 추격하게 했다"고 하였다.
    흩어진 동학군은 해미성 쪽과 면천 쪽으로 나뉘어 갔다.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관망하던 보수세력들은 앞다투어 일어나 유회소를 만들고 동학군 소탕에 나섰다. 예산 대접주 박희인도 많은 동학군과 같이 덕산 쪽으로 가다가 유회소에서 방포하자 모두 흩어져 산길에 접어들어 2일간이나 숨었다가 11월 2일에야 덕산 막동(幕洞) 김원형(金元亨)의 집에 당도하였다. 철수한 동학군 중 해미성에 집결한 인원은 3천명 정도였으며 귀밀성(貴密城)과 도루성(猪樓城)에 집결한 인원은 약 4백 명 정도였다.
    {양호우선봉일기}에는 홍주에서 물러난 동학군 4∼5만은 덕산 역말과 예산 역말에 4일간 주둔하였다가 해미로 갔다 하였다. 즉 "적정을 탐색하며 전진하는데 적도 4∼5만이 예산 역촌과 덕산 역촌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다 한다. 보고를 받자 곧 추격해 보니 해미성으로 물러갔다"고 하였다. 장위영(壯衛營) 영관 겸 죽산부사(竹山府使)인 초토사(招討使) 이두황은 홍성에 가서 관군과 합동작전을 펴기 위해 10월 29일에 출발하였다. 11월 6일에 덕산까지 당도하여 동학군의 동태를 탐문했던 것이다.
    6. 관군이 해미성과 서산 기습
    동학군들이 해미성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두황은 병력을 서쪽으로 돌려 지금의 덕산면 옥계리(玉溪里)와 상가리(上加里) 일대인 가야동(伽倻洞)에 들어가 유진하였다. 이 곳으로 들어온 것은 일락산(日落山)을 넘어 7일 새벽에 해미성을 기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밤중에 영관과 병졸 60명을 인솔하고 일락산 정상인 석문봉(石門峰, 600m)으로 올라가 4km 떨어져 있는 해미성의 지형을 살피었다. 삼경이 되자 전군을 깨워 산정으로 끌고 올라와 새벽이 되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11월 7일 먼동이 트이기 시작하자 전군에 명령하기를 "해미성으로 달려가 성의 북쪽 능선 향교부근에 집합하라"고 하였다. 이 때 동학군들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식사하기를 기다리던 이두황은 이윽고 동학군들이 아침을 들기 시작하자 전군에 공격령을 내렸다. 북쪽 성채를 넘어 벌떼처럼 처들어가니 밥을 먹다 기습을 받은 동학군은 좌왕우왕할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대오를 정돈하고 대항하려 했으나 이미 관군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2시간 남짓 동학군과 관군은 혈투를 벌였다. 훈련받지 못한 농촌 출신인 동학군은 40여 명이 전사하고 백여 명이 부상하고 말았다. 나머지는 서산·당진·면천 쪽으로 후퇴하였고 일부는 인근에 있는 귀밀성과 도루성에 합류하였다. 오후에 이르러 관군 1개 소대는 귀밀성을,  2개 소대는 도루성을 공격하였다. 여기서도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동학군이 패하고 말았다. 해미성 전투에서 동학군은 대패하였고 불랑기(佛郞器) 11좌, 대포 4좌. 자포총 22자루, 천포총 10자루, 조총 43자루, 창 85자루, 환도 9자루, 대정 3좌, 포환 130발, 연환 6궤, 염초화약 500근 등을 관군에 빠앗겼다.
    동학군 일부는 서산읍 매현에 집결하게 되니 천여 명이 넘었다. 이들은 무기를 제대로 다룰 줄 알았으며 규율도 있었다. 이튿날인 8일에 이두황은 서산의 동학군을 추격하라고 1개 중대(참령관 元世祿)를 파견하였다. {양호우선봉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튿날 ... 참령관 원세록이 ... 1개 중대 병력을 인솔하고 서산지방을 순초하려 나갔다가 적의 큰 소굴을 발견했다. 즉 서산 매현이란 곳인데 산이 높고 골짜기는 둥글었다. 원조경으로 살펴보니 주변에는 깃발을 꽂고 적들은 가운데 모여 밥을 짓고 있었다. 황혼 때에 몰래 서산읍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가 겨우 황혼이 지자 적들은 밥을 먹으라 부르고 있었다. 눈치챌가 염려되어 밥먹기를 기다렸다가 불의에 나타나 함성을 지르며 포를 사격했다. 적도 저항하니 총알이 날아가고 날아오고  대포도 연발했다. 잠간 쉬다가 또 공격하기를 2시간이 지났을 무렵, 어찌된 일인지 적이 갖고 있던 화약에 불이 붙어 굉음이 하늘을 뒤집고 땅을 꺼지는 것 같았다. 적의 무리 수천이 일시에 쏟아져 내리면서 산산히 흩어저 달아났다. 우리 병사들도 잠시 놀랐다가 정신을 차려 수백이 날세게 달려들어 물리쳤다. 흩어진 무기를 거두어 읍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매현에 주둔했던 동학군은 황혼 때 저녁을 먹다 기습을 받았다. 관군에 비해 월등한 병력을 가진 동학군은 재빨리 대오를 정돈하고 응전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약더미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 군진이 흩어져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아마도 관군이 포격으로 화약더미가 폭발한 줄 알고 당황했던 것이다. 관군도 놀라 일시 후퇴하였다가 동학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다시 공격하였다.
    서산 매현은 어딘지 밝혀내기가 어렵다. 원세록의 보고 내용을 잘 살펴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산이 높고 골짜기는 둥글었다" 했으므로 해미 쪽에서 서산읍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산이 높고 골짜기는 둥글었다"하므로 높은 산 밑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서산읍에 있는 높은 산은 서산읍 서쪽의 부춘산(富春山)이다.
    읍내동 530의 3에 거주하는 심학기(沈鶴基, 1920)는 "해방 직후 동리 어른들로부터 마사 앞쪽에서 동학군과 관군이 싸웠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한다. 서산군청 서쪽 부춘산 입구에 있는 읍내동 마사라는 곳이 바로 매현인 것 같다. 이 날 관군은 밤중에 서산을 떠나 해미성으로 철수하였는데 닭이 세 회나 울 때에  도착하였다 한다.
    일본군은 11월 9일(양 12월 5일)에 사이또(齊藤) 일본군 소위로 하여금 1개 소대와 민병 30명을 이끌고 해미로 가서 동학군의 동태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해미현감 대리로부터 "동학군 5∼6천명이 태안에 집결해 있는 것 같다"는 보고만 확인하고 홍주로 돌아왔다. 서산에서 후퇴한 동학군은 해산하지 않고 태안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 때 한산과 남포지역에 동학군 수천 명이 모여 홍주로 공격해 올 것이라는 첩보가 있어 일본군을 급히 돌아오게 했던 것이다.
    태안에 모인 동학군은 태안읍 북쪽에 있는 백화산(白華山, 284m)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추위와 식량공급이 어려워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일본군은 "도주와 잠복에 능한 동학도라도 지금 추위가 혹심한 때에 산중에는 잠복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 기회를 맞아 각 병참지 수비병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모두 토벌에 종사하고 토벌대와 잘 협력해서 여러 갈래로 진압하여 그들을 습격하면 일거에 초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11월 14일(양 12월 10일)에 일본군 산촌(山村) 대위는 동학군의 집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현장에서 타살해 버리는 잔악한 토벌작전을 펼치기 위해 해미를 거쳐 바로 태안방면으로 출동하였다. 서산으로 들렸다 가면 태안 동하군들이 기미를 차리고 도주할 염려가 있다하여 별도로 소탕조를 만들어 서산에 파견하였다. 일본군 11명과 한인 순검 김용희(金龍喜), 해미 민병장 김용산(金龍山)이 이끄는 민병 20명으로 조를 이루어 서산 동학군을 체포하러 보냈다. 이들은 11월 15일에 마을을 뒤져 동학군 84명을 체포하여 태안으로 끌고 왔다.
    태안으로 직행한 일본군은 5명 내지 10명씩 여러 조를 짜서 마을 마다 출동시켜 민병을 앞잡이로 하여 수색하게 하였다. 100여 명의 동학군을 체포하였는데 이 중에는 접주 및 지도자가 30명이나 되었다. 일본군이 노린 것은 접주들이었으며 동학을 초멸하려면 그 간부격인 접주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이튿날 태안에 군중을 불러 모아 공개적으로 동학군을 총개머리로 잔인하게 때려죽이는 야만적인 처형을 집행하였다. 산촌 대위의 보고에는 "12일(양)에 ... 읍민과 처형할 동학도를 모이게 하고 ... 괴수 30명을 총개머리로 때려죽였다"고 하였다. 그 광경은 다음과 같다.

    철야 심문 끝에 수괴(首魁)로서 사형에 처할 자를 결정헀다.  다음 날 12일 … 읍민과 동학도 추종자로서 곧 방면할 자를 처형장으로 모이게 하고 통변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취지의 연설을 하게 하였다". … 이 읍에서 잡은 동학도를 심문하였더니 동학 수괴로부터 입도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하여 할 수 없이 동학에 입도했다고 답하는 자가 있었다. … 죽음을 당할지라도 동학에 입도하지 않는 것과 국적이 되어서 오늘과 같이 도륙 당하는 것과 어느 것이 떳떳한가 잘 반성해서 앞으로 조심하라". 이런 연설을 마치고 수괴 30명을 총대로 타살하였다.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는 "주막마다 파수막을 설치, 심야까지 불을 피우고 지켰으며" 1895년 2월까지 동학도를 체포하는데 혈안이 됐다. 덕포 대접주 박인호 상사는 예산 인근 야산 토굴에서 화를 피하였고 예포 대접주 박희인은 천안 남면 곡도재 박윤길의 집에서 화를 피하였다. 여타 도인들은 혹은 산으로 혹은 뱃길로 멀리 피신하였다. 어떤 이는 황해도까지 올라가 피신하기도 하였다.


    7. 결 론
    충청도 서북부지역의 동학혁명운동은 7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8월에는 도소를 설치하고 활동에 들어갔으나 관아를 습격하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 악질 양반과 토호들을 응징하는데 주력했으며 일반 민중들은 동학에 물밀 듯이 들어와 동학의 세력은 점점 커져 갔다. 눈치만 보던 대부분의 양반들은 7월 하순부터 동학에 협조하지 않고 피난길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0월 1일에 서산·태안  동학군이 기포하자 아산, 당진, 면천 등 여러 지역에서 마침내 무장봉기가 뒤따랐다. 충청 서북부지역 동학도들은 항일전을 위해 여미벌에 모이게 됐고 비로소 본격적인 무장항쟁으로 발전하게 됐다. 9월 18일 법소에서 전 동학군에게 기포령을 내린 이후 항일전을 준비하여 오던 전 동학군은 10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호남에서는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이 일어났으며 북접에서는 신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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