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천도교
로그인 회원가입

나주지역 혁명운동 > 교리교사연구자료

회원메뉴

쇼핑몰 검색

  • 동학천도교아카이브
  • 교리교사연구자료
  • 동학천도교아카이브

    교리교사연구자료

    나주지역 혁명운동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웹마스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008회   작성일Date 11-09-08 15:49

    본문

    (교사교리연구 제 7호 - 포덕 141년 7월)

    표 영 삼

    머 리 말

    3월 21일(양 4월 26일)의 백산기포 때부터 많은 도인들과 같이 참여했던 나주지역 동학군들은 전주성 점령이후 5월 중순경에 나주로 돌아왔다.

    이들은 나주 북쪽을 장악하고 동학세상을 만들어 나갔으며 6월 중순에는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을 개혁하려 하였다. 뜻밖에도 나주목사 민종렬이 반발하여 모든 계획은 좌절되었고 11월까지 수성군과 대립하면서 싸움을 계속하여야만 하였다. 한 때는 공격도 하여보고 한 때는 협상도 하였으나 매번 헛수고로 돌아갔다.

    6월 25일경 태인·정읍 동학군 수천 명을 모아 최경선(崔敬善) 대접주가 이끌고 나주로 내려와 7월 5일의 대공세를 처음으로 폈으나 실패하였고 8월 13일에는 전봉준(全琫準) 장군이 민종렬을 직접 만나 협상을 벌였으나 역시 허사였다.

    심지어 김학진 감사를 통해 민종렬을 파직시켰지만 지방민의 완강한 반발로 이 계획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나주를 점령하지 못한 동학군은 최경선이 이끄는 많은 동학군을 이 곳에 주둔시켜야 했으며, 10월에는 손화중(孫華仲) 대접주 휘하의 동학군까지 투입하여 북상계획에 적지 않은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10월 하순부터 관군과 일본군이 출동하면서 나주 수성군은 오히려 역습으로 나왔다. 침산(砧山)전투, 용진산(聳珍山) 전투, 고막포(古幕浦) 전투 등 전후 6차례의 공방전이 있었으나 동학군 쪽이 점점 몰리게 되었다. 11월 23일에 동학군은 나주성을 최후로 공격하기 위해 함박산까지 진격했으나 무기도 턱없이 부족하였고 강추위까지 몰아쳐 전투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돌아오자 수성군의 기습을 받고 무너지고 말았다.

    나주지역 혁명운동 과정에 대한 기록으로는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과 {난파유고(蘭坡遺稿)}, {동학란기록(東學亂記錄)},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봉남일기(鳳南日記)}, 오하기문(梧下記聞)}, {용암성도사역사(龍菴誠道師歷史)}, {천도교회사초고(天道敎會史草稿)}, {동학사(東學史)} 등이 있다.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나주 동학군의 초기활동

    나주에 동학이 들어온 것은 1885년 전후로서 천도교창건록(天道敎創建錄) 정광조(鄭廣朝) 연원란(淵源欄)에 보면 나주교인으로서 만암(滿菴) 강대설(姜大說)이라는 분이 있다. 그는 1885년에 입도하여 수접주(首接主)를 지냈으며 동학혁명운동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많은 인사가 있었으나 기록이 망실되어 알 길이 없다.

    동학 세력이 늘어난 것은 1892년과 1893년 이후였다. 공주와 삼례 교조신원운동을 계기로 민중들의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천도교창건사}에는 정정식(鄭正植)과 이정헌(李正憲)·강해원(姜海遠)이란 인물이 보이는데 이들은 공주와 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던 1892년 이후에 입도한 사람들이다. 1894년 3월에 나주 동학군을 이끌고 전봉준 장군과 같이 백산에서 기포한 지도자는 오중문(吳仲文, 勸善)과 전유창(全有昌), 강대열(姜大說), 전천옥(全天玉), 김진선(金鎭善), 김진욱(金鎭郁)등이었다. 동학군이 나주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것은 4월 16일(양 5월 20일) 함평을 점령하고 다음이었다. 그러나 전봉준 장군은 나주성 공격계획을 바꾸었다. 전봉준 장군은 홍계훈 관군이 영광으로 내려오면 전주성을 공격할 뜻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전투를 피하고 특사를 보내 민졸렬을 동참하도록 권하였다.

    {오하기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들이 오늘 의거한 것은 위로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 서민을 편안케 하기 위함이다. 열읍을 거치면서 탐관은 징벌하고 청렴한 관리는 상을 주고, 관의 폐단과 병통을 바로 고치며 연달아 나쁜 병폐를 영구히 바로잡아 없애려 했다. … . 우리의 본뜻은 이에 그칠 뿐이다. 어찌하여 너희 관사(官司)는 나라의 형편과 백성들의 실정을 생각지 않고 각 읍에서 군사를 움직여 공격하기를 위주하고, 살육을 위주 하니 참으로 무슨 마음일까. 하는 짓을 생각하면 마땅히 맞서 싸워야 할 것이나, 무죄한 아전과 백성들이 다 함께 불타 죽는 것이 불쌍한 일이다. … . 이 뜻을 관사(官司)에게 고하여 각 읍에서 모집한 군대를 모두 놓아 보내어 집에 돌아가 농사짓게 하고,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즉시 풀어주어 돌려보낸다면 우리는 그 지경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한 임금의 백성으로서 어찌 공격할 뜻이 있겠는가? 가부간 속히 회답하여라. 민종렬은 회답하기를 "명분 없는 거병은 법에 따라 마땅히 벌줄 것이며, 도리가 아닌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며 거절하였다. 동학군 지도부는 격분하여 나주성을 공격하자 하였으나 전봉준 장군은 기다리자고 만류하였다.

    {금성정의록}에는 "함평에서 … 큰 것은 둘레가 열 아름이오, 길이가 십여 발이나 되는 '닭장태'를 여러 개 만들어 놓고 침입하려 하다가 민공의 답장을 보고 먹던 밥숟가락을 떨어뜨리고 혼이 빠져 북으로 돌아갔으며 '닭장태'도 가져갔다"고 하였다. 함평에서 5일간을 체류하자 4월 21일(양 5월 25일) 저녁때에 영광(靈光)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홍계훈 관군이 법성포로 상륙하는 관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영광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전 동학군에게 이 밤을 타서 나산(羅山, 나루뫼)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하였다.

    {난파유고}에는 "이날 밤 함평 진산장(津山場)으로 옮겨갔다 했으며, 다음 날(22일)에는 장성 월평으로 떠났다"고 하였다. 나산에서 일박한 동학군은 22일 새벽에 장성 월평장으로 급히 이동하여 본진을 삼봉아래에 설치하였다. 홍계훈은 함평현감으로부터 동학군이 나주와 장성 쪽으로 이동했다는 급보를 받고 당황한 나머지 이학승(李學承) 대관(隊官)을 급히 출동시켰다. 3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정오 경 월평 맞은 편 황룡천(黃龍川)에 도착한 이학승은 4천여 명 동학군이 월평 장터 일대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포 2문을 발사하여 40명을 몰살시켰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동학군은 뒷산 삼봉으로 올라가 살펴보니 관군측의 병력이 기백명임을 확인하고 반격에 나섰다. 황룡강을 건너 장태를 굴리며 신호리까지 진격하자 경군은 신촌 까치골로 후퇴하였다. 동학군은 포위작전을 펴서 이학승 대관과 5명의 장졸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지휘관을 잃은 경군은 정신없이 사창고개를 넘어 영광으로 도망쳤다.

    {양호초토사등록(兩湖招討使謄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22일 묘시(卯時, 오전 5시∼7시)에 함평현감 권풍식(權豊植)의 보고가 도달하여 보니 그들(동학군) 무리들은 우리 고을에서 장성과 나주 등지로 방금 나갔다 하며 그리고 그들 무리가 이르는바 원정서도 또한 보내왔다. … 대관 이학승·원세록·오건영으로 하여금 병정 300명을 영솔하고 장성 등지에 나가서 다만 그들의 움직임이 어떠한가 살피도록 하였다. 23일에 따로 군관 장진우 운량감관 김영태를 법성포에 파견하여 배편으로 내려온 총제영 병정을 하륙시켜 음식을 주는 것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 이날 땅거미가 진 후에 출진하였던 병정들이 황망하게 와서 고하기를 아군이 겨우 장성월평에 도착하자 피도들도 때마침 황용촌에 도착하게 되어 점점 가까워지자 접전이 벌어져 한바탕 서로 죽이게 되었다. 구르프포를 한방 쏘니 피도들이 맞아 죽은 자가 대략 수백 명이 되었다. 그러자 피도 만여 명은 세차게 달리어 죽음을 무릅쓰고 앞다투어 30여 리나 추격해 왔다. 그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아군은 힘이 빠져 넘어지고 자빠지며 허둥거리다 본진에 돌아 왔다. 동학군은 관군이 법성포에 상륙한 관군과 합류하느라 머뭇거리자 24일 오전에 장성을 출발, 갈재를 넘어 정읍을 거쳐 태인으로 강행하였다. 25일에는 금구 원평에서 일박하고, 26일에는 전주 완산(完山) 앞 삼천(三川)에 진출하여 일박하고 27일 하오 2시경에 어렵지 않게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나주 출신 동학군들은 대세가 뒤바뀌자 민종렬도 굴복할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관군과 화약이 이루어지자 수백 명 나주 동학군은 곧 내려 왔으며 북면일대에 도소를 세우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북면 일대의 동학군은 광주와 장성, 그리고 함평 북부 지역 동학군과 하나가 되어 동학세력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민종렬은 5월 초순부터 동학군을 저지할 목적으로 수성군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강진·해남·영암·장흥·보성 등지에서 장정 50명씩을 차출하도록 하여 수성군을 강화하고 있었다. 12일에는 다시 2백여 명을 징발하여 500여 명의 수성군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주 인근에서도 천여 명의 장정들을 징발하였다.

    2. 7월 5일 나주성 공방전 나주목사 민종렬 휘하에는 특출한 인물이 많아 일심 동체가 되어 동학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금성정의록}에 의하면 "남문밖에 있는 우진영(右鎭營) 영장 이원우(李源佑)와 동심 협의하여 … 정태완(鄭台完, 鄭錫珍)을 도통장에, 김재환(金在煥)을 부통장에, … 손상문(孫商文)을 도위장(都衛將)으로, 김성진(金聲振)을 중군으로, 김창균(金蒼均)을 통찰(統察)로 임명하였으며, 그리고 별장 박근욱(朴根郁)은 서문을 지키고, 병장 문낙삼(文洛三)은 북문을 지키고, 별장 박윤칠(朴允七)은 동문을 지키고, 별장 문관후(文寬厚)와 별장 박경욱(朴京郁)은 남문을 지키게 하였다. 나머지 장졸들도 재질에 따라 별장·별초·참모·서기·정탐·도훈도·천총·파총으로 임직을 맡기니 모두 68인이나 되었다" 한다. 또한 "별초군으로 힘이 세고 용감하고 건장한 자를 포군으로 삼고 마을의 한정(閒丁)을 모아 16초(哨)를 편성하고 군막을 성 위 한쪽에 두었다. 무너진 성첩을 보수하고 … 일변 사격훈련을 시켰다". 나주성의 병력은 수성군이 약 6백 명이고, 민보군이 초당 125명이므로 약 2천 명이었으니 모두 3천 명이었다. 이에 비해 오권선과 전유창·강대설·전천옥 등이 이끄는 동학군은 7천 명 정도로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으나 질적으로는 엄청나게 뒤떨어져 있었다.

    6월 중순부터 전라도 전역의 동학군은 김학진 감사와 합의하여 각 군·현에 동학집강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을 수재들은 동학군과 손잡고 대소사를 서로 의논하며 마찰 없이 안정을 유지하여 나갔다. 그런데 민종렬 목사만은 성문을 굳게 닫고 동학군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동학군 전라 대도소는 최경선 대접주가 5천명의 병력을 끌고 가 나주 동학군과 합동하여 공격하도록 하였다. 최경선은 6월 그믐께 출동하여 7월 1일에 나주 북쪽 10리 지점인 노안면 금안리에 내려오게 되었다.

    {전봉준공초}에 의하면 최경선이 나주로 보낸 것은 그가 광주지역과 나주지역에 많은 친지가 있어 기포하기에 수월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휘하에는 이형백(李亨伯)과 장운학(張雲學), 박건량(朴建良), 김중회(金中會), 김병혁(金丙赫)이 있었으며 이들은 많은 접주 중에서도 활동력이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나주로 오기 전에 여러 지역 동학군을 동원하여 편제를 마친 다음 오색 깃발을 날리며 농악대를 앞세우고 7월 1일에 나주 북방 4㎞ 지점인 금안리 일대에 진을 치게 되었다. 나주 대접주 오권선도 북면 일대에서 동학군을 동원하여 7월 2일에 금안리로 내려와 최경선 동학군과 합류하였다. 이 때 함평 북부지역인 불갑면, 월야면, 해보면, 나산면, 대동면, 심광면 동학군들이 대부분 동원되었다고 여겨진다.

    {순무선봉진등록} 함평현감 보고에 "본현 동학괴수 이화진(李化辰)을 포살하였고 … 어제 이미 보고한 바 있듯이 접주 김경오(金京五), 이춘익(李春益), 이재면(李在冕), 이곤진(李坤辰), 김성필(金成必), 김인오(金仁五), 김성서(金成西), 노덕휘(盧德輝) 등 8명도 체포하여 포살했다"고 하였다. 이들이 바로 함평 동학군의 지도자로 여겨진다. 나주성 공격은 7월 5일(양 8월 5일)로 정하고 공격시간은 오후 저녁 때 어둠을 타서 서성문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나주성은 9척의 높이에다 3,300m의 둘레로 남북으로 길게 네모진 성곽으로 되어 있었다. 북쪽에는 금성산이 진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성문은 북망문(北望門), 남고문(南顧門), 동점문(東漸門), 서성문(西城門)이 있었으며 서성문을 공격목표로 삼은 것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동학군 1만 여명은 이 날 오후에 출발하여 금성산과 그 뒤쪽을 거쳐 오두재를 넘어 저녁 해가 진 다음 어둠을 틈타 서성문으로 몰려들었다. 동학군이 공격하여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민종렬은 이원우 영장과 같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7월 5일의 공방전에 대해서 {금성정의록}과 {난파유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성정의록}= 7월 초하루 적괴 최경선은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멀리 달려 유린하면서 본 고을에 바로 쳐들어왔다. 오권선도 괴수가 되어 무리를 이끌고 금안리에다 합진하고 침탈 삼일에 금성산으로 개미떼처럼 붙어 올라 초5일 저녁 어두워지자 정산으로부터 물밀 듯이 내려와 곧바로 서문에 이르렀다. 민공은 급히 영을 내리기를 '도둑 떼들이 우리 서문에 몰려왔으니 이 곳은 내가 맡아 대적하리라. 너희들은 오직 북·동·남 삼문을 맡도록 하라. 별장들은 각기 성을 지키는데 힘쓸 것이며 놀라 어지럽게 하지 말며 이탈하지 말고 잘 대비하면 염려할 것이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적이 서문을 공격하다 동문을 칠지, 남문을 치다 북문을 칠지 모르니 이 점을 경계하여 적의 흉계에 속지 말도록 하라'. 마침내 적을 맞아 성문을 둘러보고 칼을 찬채 문루에 올라 좌정하였다. 우측에 도통장을, 좌측에 서문 별장 박근욱을 거느리고 지휘하니 절제가 지엄하고 치밀하였다. 적을 제압 승리할 방책을 이미 정하고 나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조용하게 있었다. … 적은 성문을 바라보니 텅 빈 것 같았으며 단지 등촉만 밝히고 있는 줄 알았다. 드디어 무리들을 성 아래로 와서 북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외쳐 대니 듣고 견딜 수가 없었다. 성문은 이미 굳게 닫혀 만 명이 달라붙어도 열지 못하게 되었다. 적은 일변 성문을 깨뜨리려 하며, 일변 성벽을 잇따라 기어 오르려 달려들으니 마치 숲을 이룬 것 같았다. 명령이 떨어지자 관군은 대완포와 장대포를 연이어 발사하니 불길은 붉게 솟아오르고 포성은 산천을 흔들어 놓았다. 성 위에 있던 각 초병들은 일제히 큰 소리를 지르며 최경선과 오권선 두 적괴는 도망치지 말고 목을 바치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병든 나무꾼은 호랑이와 표범의 소리를 듣기 어렵지만, 철부지 어린아이에게는 뇌성벽력처럼 들리었다.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서북쪽으로 도망치며 서로 넘어지고 밟히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사상자를 냈다.

    {난파유고}= 7월 5일 밤 적괴 최경선이 수천의 무리를 이끌고 금안동에서 금성산 낭떠러지 기슭으로 기어올라가 정상에서부터 일제히 쏟아져 내려와 서성문 앞에 다다랐다. 사태가 급박해 져 어렵게 되자 민공은 정석진을 불러 모의하여 전략을 결정한 다음 대오를 엄히 단속하고 성문을 활짝 열도록 하였다. 아무 준비를 못하고 있는 것처럼 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게 있었다. 적들이 공격하여 오자 호령이 떨어졌고 장사들은 성 위로 올라가 먼저 대포를 일제히 발사하였으며 천보조총까지 쏘아대자 뇌성벽력처럼 크게 산천을 진동시켰다. 적은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일시에 흩어져 사방으로 도망쳐버리니 수성군은 크게 이기었다.

    두 기록은 7월 5일 저녁 어두워지자 동학군 수만 명이 금성산 정상에서 쏟아져 내려와 나주 서성문을 공격했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동학군 1만 여명은 오도치(梧道峙)를 넘어 다보사(多寶寺) 부근에 이르러 산으로 올라가 성내를 살펴보고 어둠을 타고 서성문으로 공격해 들어간 것 같다. 그런데 동학군은 대포나 사다리를 준비하지 않고 화승총과 궁시로 공격한 것 같다. {오하기문}에는 7월 5일의 동학군 공격을 상식에 벗어나게 기록을 하고 있다. "대치한지 10여 일에 이원우는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속였다. 나주성 백성들은 수성하느라 고단하여 도인들이 오기를 날마다 바란다. 오늘 밤 동문을 열어 놓을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전했다. 최경선은 속아넘어가 크게 기뻐하며 삼경에 동문으로 들어갔다. 수십 보 앞에 가던 자가 함정에 빠져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계략에 빠진 것을 알고 성밖으로 퇴각하였다. 이 때 양쪽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모두 일어나 대완포 10좌를 일시에 발사하자 최경선은 대패하여 도주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서성문 밖에는 실개울이 흐르고 넓은 밭이 있었다 한다. 수성군은 이 일대에 마름쇠를 묻어놓아 동학군이 접근하기 어렵도록 하였다 한다. 사기가 충천한 동학군은 물밀 듯이 환성을 지르며 마름쇠를 밟고 서성문으로 돌진하였다. 이 때 많은 인원이 부상하였으며 성문 앞에 이르러 성문을 부수려 하는가 하면 성을 타고 넘어가려 하였다 한다. 이 때 수성군은 10문의 대포와 3백여 명이 천보조총을 일시에 발사하여 많은 동학군을 사살하였다 한다. 민종렬은 천보조총으로 무장시켜 화력을 보강하였던 것이다. 9척의 높은 성벽 밑에서 좌왕우왕 하다 결국 물러서고 말았다.

    3. 나주성 외곽 봉쇄 나주성 공격에 실패한 동학군은 다른 지역에서 반혁명 움직임이 있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나 최경성 대접주와 오권선 나주 동학군은 비록 성은 장악하지 못했으나 동학군의 사기는 여전하였다. 동학군으로서 취할 수 있는 정략은 외곽 일대를 봉쇄하고 인마의 왕래를 막는 것이었다. 이해 6∼8월에는 몹시 가물었으며 전답은 먼지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동학군 측에서도 식량공급이 제대로 안되어 어려움이 많았다. 전봉준 장군은 동학군을 재투입할 생각도 하여보았으나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지장을 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김학진 감사로 하여금 민종렬 목사와 이원우 영장을 개체하도록 계청하게 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도 일본군이 물러가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라감사의 계청을 신중하게 다루었다. 7월 19일자로 김학진의 계청을 받아들여 나주목사와 이원우를 개체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나주목사로 박세병(朴世秉)을 발령하였다. 이로써 사태는 제대로 수습되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원우 영장과 나주읍민들이 반발하여 민종렬을 못 떠나게 하였다.

    {오하기문}에는 다음과같이 기록하고 있다. "민종렬이 파직 당하자 관민이 떠나지 못하게 막으므로 떠날 수가 없었다. 또한 적이 좋아할 일이므로 민종렬도 어찌할 바가 없었다. 이원우 영장은 흥분해서 이런 조처는 조정의 본뜻이 아니라 적신들의 사주에 의한 것이니 민목사는 가고자 하면 스스로 떠나가되 나는 떠나갈 수가 없다면서 수성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박세병은 부임할 방도가 막혀버렸다"고 하였다. 7월 하순부터 정부는 승지 엄세영(嚴世永)을 전라도에 보내 동학군을 귀화하도록 효유하게 하였는데 나주에 들러 민종렬을 만났다. 그간의 사실을 알아보고 정부에 보고하기를 "도내 군 현들이 적의 손아귀에 다 들어갔으나 나주만은 금성철문처럼 지켰다"고 하였다. 조정은 8월에 이르자 동학을 본격적으로 소탕하는 쪽으로 정책을 더욱 굳혀 나갔다. 따라서 민종렬은 계속 나주목사로 있게끔 기울어 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전봉준 장군은 민종렬을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려고 나서게 되었다. 관찰사와 비장의 서찰을 받아 가지고 관원 몇 사람과 수하 등 10여 인을 대동하고 8월 8일에 전주를 떠났다. 나주 북면에 들러 최경선과 오권선 대접주를 만나 전후 대책을 의논한 다음 통로를 봉쇄하고 있던 동학군을 20∼30리 후방으로 물러나게 하고 8월 13일에 나주성중으로 들어갔다.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 대장은 최경선에게 통지하여 곧 군대를 거두어 돌아오게 하고 전 대장은 스스로 종자 수인을 데리고 나주 읍에 이르니 사문 수성이 오히려 게으르지 않았다. … "방금 우리 나라는 왜구가 독수를 내밀어 침략을 꾀하고 국정은 나날이 말이 아니어서 나라 존망이 목전에 있으니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어서 바삐 꿈을 깨라" 하니 목사가 전 대장의 기품을 보고 언사를 들으매 간담이 서늘하여 말문이 막히어 감히 한마디도 항변할 수 없었으며 오직 머리를 숙이며 전후사유를 듣기를 청할 뿐이라. 전 대장이 다시 천하대세며 홍계훈과 강화하던 말이며 각 군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서로 국사를 의논하는 등 전후 수말(首末)을 낱낱이 말하니 사리가 그럴듯하고 위풍이 또한 늠름한지라 목사는 다만 한마디로 유유(唯唯)할 따름으로 이 날부터 집강소를 설치하여 정사를 보게 하였다.

    {동학사}는 "이 날부터 집강소를 설치하여 정사를 보게 하였다"고 하였으나 합의한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집강소도 설치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서로의 적대관계만 확인하는 데 그쳤다. {금성정의록}에는 {동학사}와는 반대로 전봉준 장군을 비하시키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기회를 보아 처단하려 하였으나 전봉준 장군이 꾀를 써서 겨우 사지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8월 13일 거괴 전봉준이 도당 십여 인을 거느리고 손에는 한치의 무기도 휴대하지 않은 채 본주 서성문에 와서 수문 별장에게 청했다. 나는 순영문의 문첩과 비장(裨將)의 사통을 갖고 왔으니 문을 열라하자 … 별장은 민 태수에게 전하면서 이 적을 도살함이 어떻겠는가고 물었다. 민 태수는 그가 단신으로 왔으니 감영의 지휘로 온 것이다. … 싸움에 임해 적을 죽이는 것은 당연하나 걸련(乞憐)의 내청자를 죽이는 것은 무사답지 않으니 너희들은 의심치 말고 불러오라고 했다. 봉준은 인사를 나눈 다음 우리들(동학도)은 근년에 … 탐관오리의 학정을 감당키 어려워 집을 떠나 … 머리를 모아 행동을 같이하여 … 병든 세상을 바로잡으려 했다. … 다른 뜻이 아니라 공은 특별히 이해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민 공은 … 본래 너희들은 전라 좌도에서 … 이미 세상을 어지럽힌 무리들이며 감히 고을을 지키는 관을 모해하고 순찰사를 쫓아냈으며 경군과 싸워 위로는 군주의 정사에 근심을 끼쳤고 아래로는 만백성들을 처참하게 핍박했다. … 개를 기르는 것은 도적을 보고 짓게 하자는 것이오 울타리를 치는 것은 도둑을 막자는 데 있다. 오두막도 그러하거늘 항차 나라의 중요한 진성을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봉준은 낙담하여 입을 다문 채 얼른 일어나 객사에서 자고 이튿날 떠나려 했다. {금성정의록}은 감사와 비장이 보낸 서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도 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전봉준 장군이 나주에 왔는지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전봉준 정군이 민종렬에게 머리를 숙이고 애원한 것처럼 기록하였을 뿐이다. 한편 친일집단 정부는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파직했던 민종렬을 다시 추천하도록 지시하여 8월 17일자로 민종렬과 이원우를 나주목사와 우진영 영장으로 재임명하였다. 결국 평화적인 해결방법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4. 수성군 10월부터 반격 9월 26일(양 10월 24일)에 일본군은 3만 병력을 출동시켜 압록강을 건너 구룡성을 점령하면서 대륙침략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수송로 확보를 위해 후비보병 제19대대를 주축으로 하여 제18대대 제1중대, 제6연대 제4, 제6, 제7, 제8중대 및 제10연대 제4중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들은 황해도와 삼남 일대에 투입하였다. 현역 3년, 예비역 4년을 거치고 다시 5년간의 후비병역에 근무하는 이들 병사는 30세 전후의 병사들로 편성하여 10월 6∼7일(양 11월 3∼4일)에 한국으로 급파하였다. 당시 관군 중에는 일본군의 훈련을 받은 교도중대가 있었고, 장위영(壯衛營), 통위영(統衛營)이 있었다. 모두 신식무기(스나이더 총)로 무장하여 전력을 크게 보강하였다.

    김홍집 내각이 전라도와 충청도 동학군을 토벌하여 달라고 일본군에게 요청하는 한편 9월 22일(양 10월 20일)자로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임명하고 순무영(巡撫營)을 창설 하여 동학군 토벌에 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고을에는 민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초멸하라고 명령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지시를 받은 민종렬은 더욱 기세를 올려 수성군으로 하여금 동학군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데 하였다. 그리고 민종렬은 9월 29일자로 소모사에 임명되었다.

    {봉남일기}에는 "이 때 나주에 병력을 늘리고 성첩을 수축하고 무기를 보완하는 등 동학군과 대항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고 하였다.

    {금성정의록}에도 "부통장인 김재환이 대완포와 장대포가 무거워 다루기 쉽도록 포차(砲車)를 만들었는데 매우 정교하여 좌우회전이 마음대로 되게 하였다"고 하였다. 동학군은 10월 10일 이후 충청, 경기, 강원, 호남, 경상, 황해 각지에서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재기포하였다.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북접 통령은 공주를, 김개남 장군은 청주를 향해 북상하였고 손화중과 최경선 휘하의 동학군들은 나주로 집결하였다.

    특히 손화중 대접주는 고창 등지에서 동학군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 동학군과 같이 나주 동쪽 20리 지점인 침산(砧山)과 송정리 옆에 있는 선암(仙巖), 북쪽인 용진산(聳珍山) 일대에 진출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 흥덕현감 보고에 "동학도당들은 지난 달(10월) 15일 이후 나주 수성군을 치러 간다며 모두 모여 갔으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흥덕현감보고에도 "본현 이동면 은동 서상옥(徐相玉), 일서면 진목정 정무경(鄭武京)은 … 동학군을 이끌고 나주로 갔다"하였고, "이동면 교동 고태국(高泰國)은 바로 적당의 흥덕 대접주로서 … 9월 18일에 나주성을 함락시킨다며 수백 명의 무리를 이끌고 광주로 갔다"고 하였다. 또한 "이동면 내옥리 고성천(高成天), 정읍 남촌 강윤언(姜允彦), 고부 하오산 김태운(金太云), 무장 사기점 추윤문(秋允文) 등 4명은 … 10월에 동학군을 이끌고 나주로 가서 감히 선봉이라 했다"고 하였다. 고창군 설송면 괴치리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 행렬은 성송면(星松面) 괴치리 손화중 대도소에서 장성 삼계면 신사(新沙)까지 맞닿았다고 전해진다. 수만 동학군이 집결하자 민종렬은 당황했으나 10월 12일(양 11월 9일)에 일본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히려 선제 공격을 생각하게 되었다. 광주군 동곡면(東谷面) 소재지인 침산을 선택하였다. 동학군 7백 여명은 능선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난파유고}에는 첫 승리를 거두었다 하였다.

    20일에 민종렬이 장대에 나와 출전명령을 내렸다. 선봉장에 김창균, 우군으로는 정석진, 중군으로는 김성진으로 하여 각각 2백 명씩의 포군을 인솔하고 출발, 동남쪽 5리 지점인 석현리에 당도했다. 김창균이 연로하여 추위에 떨자 여러 사람이 별안간 걱정하였다. 정석진이 선봉이 되기를 청하며 이르기를 비록 장령으로 선 후진이 정해졌으나 사정이 이와 같으니 내가 선봉이 되고 군이 후군이 되는 것도 임기제변(臨機制變)의 대책이 아니겠는가하며 선후를 바꾸었다. 21일에 전진하며 정탐하니 적도 7백여 명이 광주 침산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기세를 올리며 소라를 불고 사기를 떨치며 총을 쏘고 함성을 질러대었다. 일후(一帿, 1km)의 거리까지 전진하여 일자형으로 돌격케 하였다. 포수 강춘삼(姜春三)이 대완포를 쏘자 민가에서 불길이 솟았다. 연달아 천보조총을 사격하여 살육하니 적은 저항도 못하고 포와 창을 버리고 도망치니 아무도 없었다. {금성정의록}에도 {난파유고}와 같이 과장하여 기록하고 있다. 물론 600명의 관군과 700명의 동학군은 병력의 수에서는 비슷하나 무기체제와 전투력을 비하면 수성군이 월등하게 우세하였다. 12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하오 2시에 이르자 동학군 측이 점점 열세로 밀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손화중 대접주 본대가 있는 선암(仙巖)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수성군은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자 사기가 충천하였으며 동학군이 별 것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수성군은 선암일대에 엄청난 동학군이 집결하여 있으므로 추격할 엄두도 못 내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선암은 찰방역참(察訪驛站)으로 어등산 서남쪽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때마침 접응장(接應將) 손상문·박재구·구유술(具有述)·김학술(金鶴述)·전학권(錢學權) 등이 포군 100명을 이끌고 달려오자 생각이 달라졌다. 식사를 마치고 10여 리 떨어진 선암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학군 만 여명은 강병에 깃발을 꽂고 포성을 울리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수성군은 박재구를 선봉에 세우고 "뒤지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내몰았다.

    {금성정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적이 머지 않은 곳에 있으니 만일 바라만 보고 공격을 지체하면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도두게 할 것이니 득 될 계책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고되게 승리한 수성군으로 날쌔게 공격하면 쉽게 부술 수 있다면서 진격하라 명령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적세가 엄청나 중과(衆寡)가 현격하므로 승패를 예측키 어려우니 돌아갔다가 뒷날을 도모하자고 만류하였다. 도통장은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 저 보잘 것 없는 비류는 처음 패한 나머지 필연코 무리들은 의구심을 가질 것이며 우리 군대는 이겼기 때문에 용기 백배할 것이다. 또한 적의 무리들은 오합지졸이고 관군은 적으나 모두 맹수의 모습이다. 그런데 {난파유고}에는 공격하던 수성군이 동학군의 작전에 말려들었다가 빠져 나왔다는 애매한 대목이 있다. 선암 전투는 강을 사이에 두고 포를 쏘며 대치하다가 동학군이 어등산 남쪽 야산으로 물러서자 수성군은 의심 없이 추격해 들어가다가 "깊이 들어가 고군이 될 염려가 있어 깃발을 흔들어 군대를 불러냈다. 호명하여 점검하여 보니 한 사람도 부상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수성군이 동학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었음을 시사하는 기사이다. 동학군은 선제공격을 한 수성군에게 승리하지는 못했으나 큰 타격도 받지 않았다. 당시 동학군은 수성군과 싸우는 일과 같이 식량을 조달하는 일이 어려운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래서 추수가 끝나 장성·고창에서 많은 군수물자를 날라왔으나 원체 많은 병력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식량문제가 심각하였다.

    {봉남일기}에 "고창접 동학군이 본부(장성)에 이르자 우리 마을에서 400상의 점심을 지어다 바쳤다. 봉연과 친구 송위성이 와서 말하기를 군수전을 토색하기 때문에 피해 왔다고 하였다. 각 리와 면에서는 쌀과 군수전을 임의로 내게 하며 어떤 사람은 앙심으로 빼앗아 가는 폐단도 있어 원성이 높다. 저녁때에 고창접 동학군 천 여명이 황룡장터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전라 대도소에서는 항일전을 앞두고 9월부터 각 군에 군수물자를 할당하였으며 9월 하순부터는 예정대로 거두어들이기 시작하였다.

    {영상일기}에는 "적도가 본도의 대동목(大同木, 무명)과 민간으로부터 공전(公錢)과 전세미(田稅米)도 매결(每結) 10두씩을 거두었다. 앞서 적이 각방(各坊)에서 거둔 쌀은 대방(大坊)에서 백 석, 소방(小坊)에서 80∼90석이었으므로 48방에서 거둔 쌀은 몇백 석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전라도 동학군은 김학진 감사가 적지 아니 협조하여 이렇다 할 적대관계를 피하여 왔다. 그런데 9월 22일 김학진 감사가 물러나고 23일자로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가 전라감사로 부임하면서 사태는 불리하게 흐르기 시작하였다. 김학진 전라감사는 아마도 8월 25일 5만 여명이 운집한 남원대회를 통해 동학군이 항일전에 총궐기할 것을 결의하자 스스로 물러난 것 같다. 그런데 호서지역에서도 동학군들이 강력하게 기포하자 10월 6일자로 이승우를 홍주목사로 다시 임명하여 방비에 힘쓰도록 하고 이도재(李道宰)를 전라감사 대리로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동학군과 관은 대립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한편 10월 28일자로 호남 초토사로 임명받은 민종렬은 일본군과 관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초토영을 설치하는 한편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수성별초 박봉년(朴琫年) 등을 시켜 향교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생들은 동학군의 보복이 두려워 "관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였다. 유림 이병수 등은 "방금 임금이 격노하여 관군을 출동시켜 빠른 시일 내에 도둑을 쳐 없애라고 명령하였으니 (우리가 일어나 공을 세우면) 임금님이 힘써 이룬 공을 탐하는 것이 되어 도리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차라리 때를 기다리며 예기를 다듬었다가 시기를 보아 일어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다.

    동학군과 수성군 사이에는 약 10여 일간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11월 6일(음)에 이도재 전라감사가 나주목사에게 "경병 5천명이 이미 전주에 들어왔으니 안심하고 출병하여 동학군을 초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동학군 측은 11월 초에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 배규인 등이 모여 고창, 장성, 광주, 동복, 남평, 나주, 함평, 무안, 진도 등지 동학군들을 동원하여 나주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합의된 전략에 의하면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이 이끄는 동학군은 북쪽 지역에서 공격하고, 무안의 배규인은 서남쪽 함평 고막포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함평 동학군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김경옥(金京玉), 이춘익(李春益), 이재민(李在民), 이곤진(李坤辰), 김성필(金成必), 김인오(金仁五), 김성오(金成五), 김성서(金成西), 노덕팔(魯德八) 등이었다. 그리고 <전라도소착 소획동도성책 designtimesp=10516>에는 거괴로 이은중(李殷仲)이 들어 있다. 무안 동학군을 이끌었던 지도자로는 배규인(裵奎仁), 배규찬(裵奎贊), 송관호(宋寬浩), 임운홍(林雲洪), 정경택(鄭敬澤), 박연교(朴淵敎), 노영학(魯榮學), 노윤하(魯允夏), 박인화(朴仁和), 송두욱(宋斗旭), 김행로(金行魯), 이민홍(李敏弘), 임춘경(林春景), 이동근(李東根), 김응문(金應文) 등이다. <전라도소착 소획동도성책 designtimesp=10517>에는 "무안적괴 배정규(裵正圭), 박순서(朴順西), 김자문(金子文), 정여삼(鄭汝三), 김여정(金汝正), 장용진(張用辰), 조덕근(趙德根) 등이 기록되어 있다.

    민종렬은 북부지역 동학군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11월 10일에 병력을 출동시켜 선제 공격을 감행하였다. 동학군이 만일 나주성에 접근하면 방어전을 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선제공격으로 나선 것이다. 도통장은 11월 11일에 600명의 수성군을 이끌고 북면 쪽으로 출동하였다. 첫날은 주엽정(周葉亭, 朱葉亭·竹葉亭)에 이르러 하루를 유숙하고 12일에는 북창(北倉)에 도착하였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려 부득이 5리 정도 되돌아와 죽산(竹山)에서 유진하였다. 13일에 다시 북창으로 진출하여 탐문하니 동학군은 광주 두동·신촌·칠봉·비시동·용동·천동·성대마을 일대에 유진하고 있었다. 한편 동학군은 수성군이 도착하자 전번에 선암 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살려 들판보다 산악전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이 날 새벽에 용진산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수성군은 산 중턱까지 올라갔으나 동학군이 험준한 산상에서 내리 공격하니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 수성군은 일단 후퇴하여 후응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녁이 되어 수성군은 산에다 불을 질렀고 밤하늘에 대고 포성만 울리니 천지가 진동할 뿐이다. 산상에 포진한 동학군은 수성군이 문제가 아니라 강추위와 식사문제로 견딜 낼 재주가 없었다. 새벽이 되자 결국 동학군은 장성 쪽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번 전투도 아쉬움을 남긴 채 물러난 것이다.

    {금성정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0일에 전공을 세운 수성군이 돌아 왔다. 이 날 밤 북면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오권선이 다시 각읍의 동학군을 모아 재산을 약탈하니 사람들은 아무도 버틸수가 없으며 또한 아침저녁으로 나주로 돌입하여 성보(城堡)를 점령할 것이라며 기세가 매우 험악하다. 민공은 도통장을 불러 이르기를 뉘우치지 못한 저 오권선을 통탕하면서 욕심과 독을 품은 흉칙한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아직도 해충의 여독을 지녔으니 빗나감이 생각보다 심하다. 당연히 병력을 출동시켜 적도들을 토벌하여 위험에 빠진 백성의 목숨을 건져야 한다고 하였다.

    11일 오후에 행군한 수성군은 주엽정에 이르러 일박하고 12일에는 40리를 진군하여 북창점에 이르렀다, 적들은 방금 광주 두동에 주둔하고 있으며 말로는 수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얼마 후 5개면 집강들이 … 각기 수백 명의 민병들을 이끌고 와서 모였으며 후응장 손상문, 최성순, 김창균도 역시 후응군을 이끌고 왔다. 비는 오래도록 개일 줄을 몰랐고 날은 점점 어두워져 광야에 유진하게 되니 형편이 난처하여 죽산 앞뜰 부근으로 이진하게 되었다. 촌민들은 다투어 술과 음식을 가져다주며 맞았으며, 수성장은 어찌하여 어두운데 이처럼 찾아왔는가고 하였다. … 이튿날 정탐에 의하면 적들은 용진산 위로 옮겼다 한다. 마침내 중군 김성진으로 하여금 큰 깃발을 세우게 하고 대적할 대책을 마련하니 도부통장과 향도관 임주호, 유의근, 돌격장 강춘삼, 천보대장 전공서 등 33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배나 빠른 걸음으로 도달하여 몰래 적세를 살피었다. 별안간 용진산 중턱에서 수천 명의 적도를 만나게 되자 적들은 포를 어지럽게 쏘아 댔다. 강춘삼에게 곧 대완포를 시험으로 쏘아보라 명하였으며 천보총도 뒤 따라 연발하니 두 진영이 쏘는 포성으로 천지는 뒤흔들리었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접전에 응하기가 어렵게 되어 깃발을 휘둘러 군을 불러들였다. 중군에 급령을 내려 두 분대로 나누게 하고 한 지대는 진의 좌편 산 위로, 한 지대는 본진에 속하도록 하였다. 때마침 후응장인 손상문이 군대를 끌고 와 합류하니 군의 위용은 차츰 정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은 산 위에 있고 관군은 아래에 있으니 지형이 불리하여 걱정하고 있을 즈음에 응접장 박근욱, 박재구, 최윤용, 구유술이 병력을 이끌고 오게되자 그를 산정 우변에 진을 치게 하여 삼면에서 적을 맞도록 하였다. 그리고 민병을 좌우 둘로 나누니 모두가 용감하여 보였다. 임여현 등은 산의 좌편에 불을 지르게 하여 식량 나르는 길을 차단 하였고 김성진은 산의 우측에 불을 질러 달아날 길을 차단하게 하였다. 양측의 치열한 싸움은 야반에 이르자 적진에서 포성이 점점 줄어들어 갔다. 강춘삼이 바위에 의지해서 올라가 살펴보니 과연 대항하는 적들이 없었다. 나무를 붙잡고 벼랑기슭으로 북쪽 길을 따라 도망쳐 버린 것이다. 일제히 산 위로 올라가 무기들을 수습하니 전군은 크게 이겼다. 돌아와 소를 잡고 푸짐하게 먹었다.

    {난파유고}에도 거의 똑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일제히 산 위로 올라가 무기를 수습하였으나 밤이 깊고 산이 험악하여 추격하지 못하고 돌아와 북창 큰 뜰에 유진하였다"고 하였다. 동학군이 모두 물러가 조용해 지자 산으로 올라가 보았던 것이다. 이 때 고막원 일대에 집결해 있던 동학군이 협공작전을 폈어야 성공할 수 있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지 못했다. 당초 나주성 공격일을 11월 15일쯤으로 잡아놓고 준비를 진행시키다가 수성군의 선제공격을 받아 협공작전이 어긋난 셈이다.

    6. 고막원서 공방전 무안·함평 동학군은 당초 약속대로 나주 서쪽 30리 지점인 고막포(古幕浦, 咸平郡 鶴橋面 古幕里)와 고막원(古幕院, 羅州郡 文平面 玉堂里) 일대에 집결하고 있었다. "서면을 정탐하니 무안군 고막포 등지에 적이 5∼6만이나 모여 있었다. 이들은 서쪽 5개 면에 침입하여 약탈하며 이미 진등참(長嶝站)에 이르러 나주를 공략한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민종렬은 북면 용진산에 출동한 수성군을 급히 불러들였다. 그리고 전주에 내려온 일본군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했다.

    {동학당정토약기}에 보면 "정토군이 전주에 있을 때 나주에 있던 초토사 민종렬이 구원해 주기를 여러 번 청해왔으나 태인과 기타 지역의 비도를 소탕해야 하므로 다만 회답만을 해주고 말았다."고 하였다. 민종렬은 이번에도 동학군이 나주성 인근으로 접근하여 오기 전에 포군 300명을 출동시켜 선제공격을 시도하였다. 석현전투와 선암전투, 용진산 전투를 통해 동학군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훈련받지 못한 농민들일 뿐만 아니라 조총과 궁시와 창칼로 무장하고 있는 동학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수병력으로도 능히 대적할 수 있으며 선제공격을 하면 기세를 누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11월 17일(양 12월 13일) 점심 후에 수성군은 나주를 떠나 20리 지점인 자지재(紫芝峴, 多侍面 佳雲里)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도통장은 100명의 포군과 강춘삼·전공서를 이끌고 앞뒤에 적진이 포진하고 있는 새꼴장(草洞, 多侍面 永洞里)으로 넘어가 유진하였다. 때마침 전왕(田旺)·지량(知良)·상곡(上谷) 등 3개면 민병 2천 여명이 당도하여 큰 힘이 되었다. 이 민병들은 관군 후위에 배치하고 "기세만 올리되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엄명하였다.

    18일 아침 부통장이 이끄는 병력과 합류하여 고막원(文平面 山湖里, 現 古幕院驛) 동쪽 청림산(靑林山, 多侍面 文洞里) 일대와 호장산(虎壯山, 虎長山, 多侍面 松村里), 그리고 진등참(多侍面 동곡리 文洞里) 일대에 포진하고 있는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전투는 수성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으며 3백 명의 수성군을 앞세워 대포만 쏘아댔다. 산에 있던 동학군들도 들판으로 내려와 반격에 나섰으며 양군은 접전하자 사면에서 불길이 오르고 포성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얼마 후 후응장 최성순(崔成純)과 박근욱, 구유술이 수성군과 민병 3천 여명을 이끌고 뒤따라 왔다. 동학군은 수다(水多)와 진등 일대에서 숲을 방불케 하리만큼 깃발을 날리며 위세를 떨쳤다. 수적으로 월등한 동학군의 무기는 조총과 시석(矢石)이었으며 대포와 천보조총으로 무장한 처지라 싸움이 되지 않았다. 수성군의 대포와 천보소총의 탄환은 동학군 진영까지 날아와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나 동학군의 화승총과 시석은 수성군 진영에 도달하지 못하니 1시간이 지나자 동학군측에는 희생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부득이 동학군은 5리 가량 밀려 고막교를 건너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에 이르렀다.

    {난파유고}에는 고막교를 건너가던 동학군은 밀물이 들어와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고 하였다. 추격하던 수성군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철수하고 말았다. 얼마 후 밤이 되자 대오를 정비한 동학군은 반격에 나섰다. 지형의 불리함을 알게된 수성군은 고막원 뒤편 호장산 언덕으로 후퇴하여 진을 쳤다.

    {난파유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관군과 민병을 합치니 3천 여명에 이르렀다. 수다, 진등에서 대적하게 되어 포를 쏘니 산상에 있던 적도들은 해산하였다. 차차 진군하니 적의 큰 병력이 진등 아래위에 가득했으며 기치는 숲과 같이 늘어서 있었으니 마치 물이 넘치는 기세였다. 급히 명령하기를 대완포를 먼저 쏘고 뒤따라 천보조총을 쏘라고 하였다. 도통장과 부통장이 사졸보다 앞장서서 시석을 피하지 않고 용맹스럽게 독전하였다. 중군이 적진 좌측을 엄호 공격하니 포탄이 떨어지자 적당이 쓰러져 죽었다. 수성군이 용략하니 일당백이 아님이 없었으며 시체가 들에 가득 널렸다. 10여 리를 따라가 죽이자 고막교에 이르렀다. 사람은 많고 다리는 좁은데다 조수가 넘치니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적은 드디어 계책이 궁하여 죽기로 달아났다. 호장산에 진을 친 수성군은 인근 5개 면에서 소를 잡고 주식을 날라다 포식하고 골아 떨어졌다. 이날 밤 민종렬은 별안간 수성군을 회군하도록 명령하였다. 북면 일대의 동학군 만여 명이 나주에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수성군을 불러들인 것이다. 밤중에 병력을 이동하면 위험이 따른다 하여 19일새벽까지 유진하였다가 정오 경에 나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삼 개 면에서 강제로 동원하였던 민병들은 모두 다시면에 남게 하였다. 고막포로 후퇴하였던 동학군은 19일부터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서창(西倉)으로 가서 세곡을 거두어다가 나주 공격을 다시 준비하였다. 민종렬은 북쪽 동학군이 움직임이 없자 20일 밤에 중군 김성진에게 포군 50명을 이끌고 20일 밤에 고막포 쪽으로 출동시켰다. 선발대로 진등에 간 이들은 이 곳 민병통령 조맹균(曺孟均)과 합류하였다. 21일에는 도통장 정석진과 도위장 손상문이 포군 3백 명을 이끌고 뒤따라 와서 합류하였다.

    {금성정의록}에는 "적군은 관군을 보고 나는 듯이 도주하여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고막산을 향해 도망쳤다. 20여 리를 추격하자 적도들은 기세가 꺾여 모두 흩어져 버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난파유고}에는 수성군이 매우 난처한 처지에 이르러 조심조심 철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학군은 인근 지역으로 나가 식량을 조달하고 있을 때 수성군이 진격해오자 여기서부터 전투가 벌어졌다. 고막산 일대로 돌아가자 이 곳까지 따라 온 수성군은 동학군의 완강한 저지에 밀려 싸우다 날이 이미 저물어 대적하기가 어려워 호장산으로 물러서야 했다. 하루 종일 병사들은 물 한 모금 먹지 못하여 쓰러질 지경이었다. 군관 김일운(金一云)을 시켜 마을에서 주식을 얻어다 기갈을 겨우 면하게 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이 때 수성군은 나주로 환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요기를 하고 나자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포를 쏘고 함성을 질러대며 진격할 기세를 보이게 하고 … "중군 김성진으로 하여금 본진의 병력을 인솔하고 먼저 환군하도록 하였다. 한편 본대가 안전하게 멀리 가게끔 도통장 정석진과 도위장 손상문은 포군 40명씩을 이끌고 호장산 후미진 곳에 매복하여 엄호하고 있다가 본진이 자지현에 이르자 안심하고 환군하였다. 이것은 수성군이 동학군을 공격하는 데 한계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막포 전투에서 동학군은 역시 크게 패배한 것이 분명하다.

    {진도종리원연혁}에 "나치현(羅致炫) 등 여러 지도자들이 많은 동학군을 이끌고 고막포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세가 불리하여 후퇴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나치현이 수성군에 체포되어 학살당하였다"고 하였다. 북쪽과 서쪽에서 협공한다는 작전은 손발이 맞지 않아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7. 나주성 최후 공격 북면 일대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던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 동학군은 11월 22일부터 나주공격을 다시 시도하였다. 5~6개 고을의 도움을 얻어 11월 23일에 나주에서 북쪽 10리 거리인 노안면 금안리와 남산리 일대로 진출하였다. 이날은 몹시 추웠으며 밤이 되자 강추위가 더욱 몰아쳐 손발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남산리를 출발한 동학군은 나주 북문 밖 함박산(咸朴山)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강추위가 더욱 거세지자 손발을 움직일 수 없어 공격을 단념하고 남산촌으로 돌아왔다.

    {금성정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날 밤 북문 밖 함박산까지 근접해 왔다. 민 태수는 영장 이원우와 같이 북문에 올라 옹성막(瓮城幕)을 다니며 병졸들을 위무 격려했다. 몹시 추워 금산 의막(義幕)에서 병졸이 불을 피웠는데 세찬 바람으로 불이 막소로 옮겨 붙었다. 폭죽 터지는 소리가 마치 대포를 연방하는 것 같이 요란하였다. 이 때 동문 밖에서 도깨비불이 노끈에 불을 당긴 것처럼 줄지어 번져갔다. 염탐하던 병사가 와서 고하기를 적들은 놀라 관군이 산 위에서 봉화 불을 들고 발포할까 의심하더니 남산촌 부근으로 퇴각했다. {난파유고}에도 똑같이 기록하고 있으나 모두가 과장된 기사이다. 수성군 막소에 불이나 대나무 마디가 터지는 소리에 놀란 동학군은 후퇴했다든지, 도깨비불을 보고 놀라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오하기문}에는 "이원우 등이 병졸들을 엄히 하고 대기하고 있자 적들은 감히 성 아래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또한 날씨도 혹심하게 추워 들에서 유숙할 수 없게 되자 1천 5백의 무리들은 동리로 돌아가 민가를 빌려 유숙하였다. 관군은 눈치채고 몰래 야습하여 참살하거나 체포한 수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양민도 많이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산촌 공격은 야습한 것이 아니라 24일 오후 1시경 대낮에 수성군이 기습하였다.

    {금성정의록}에 의하면 민종렬은 "24일에 도통장 정석진이 군을 정돈하여 출정할 때 민태수는 … 성문밖의 일은 도통장의 재량에 맡기니 적을 가벼이 보지 말고 신중하게 심력을 기울여 공을 세우라고 하였다. 또 도위장 손상문에게 포군과 천보대를 인솔하고 앞에 나가 적과 대항하라하고, 초관(哨官) 박성로에게는 포군 1백 명을 인솔하고 산길을 따라 좌측 통로를 차단하라 하고, 별장 전학권(錢鶴權)에게도 포군 1백 명을 인솔하고 그들의 우측 통로를 차단, 이른바 삼로에서 기습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선봉장 정석진과 손상문은 군을 이끌고 직접 남산촌 앞에 이르러 숲이 우거진 곳을 통해 엿보니 깃발은 하늘을 덮었고 막사들은 산에 둘러 쳐 있었다. 곧 소를 잡아 포식하려는 때에 김기옥이 이끄는 천보대가 일제히 발포하니 다른 관군들도 분발하여 포를 난사했다. 적들도 포를 쏘며 응수하여 함성을 질러댔다. 양 진영이 쏘는 포소리로 산악이 찢어지는 듯 했으며 화염은 하늘을 덮었다. 마침내 적들은 크게 무너져 도망쳤으며 쓰러진 시체는 들에 가득하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루었다. "적괴 오권선은 겨우 빠져 노새를 타고 도망치자 천보대가 남산을 넘어 쫓아갔으나 하촌(下村)에 이르니 사라져 버려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하였다. 용산동 2구(남산)에 거주하는 김순모(金順模, 1923)는 아버지 김형준(金亨俊, 1875)으로부터 들었다며 "동학군은 남산에 주둔하고 있었고, 수성군은 나주에서 구정리(九丁里) 언덕까지 와서 대포와 천보조총을 쏘며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수성군은 삼면에서 공격하였으며 동학군은 남산리 남쪽 능선에 올라가 응전하였다 한다. 구정리 앞산과 남산리 능선 거리는 200m 정도였으며 결국 동학군 측이 밀려 남산 옆 언덕에서 많이 전사하였다"는 것이다. 공격한 시간은 점심 때로 여겨지며 약 1시간 정도 교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 24일의 나주지역 최후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은 일단 광주로 후퇴하였다. 당시 동학군은 주력병력인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이 공주 우금티와 청주전투에서 각각 패하여 남으로 밀리고 있었다. 특히 11월 25일 금구 원평에서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통령이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싸우다가 패전하자 동학군의 사기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광주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손화중과 최경선은 "11월 27에 수만 명을 이끌고 성중으로 들어와 공해나 민가에 머물렀다가 12월 1일 10시경에 도당을 해산하고 떠나갔다" 하였다. 손화중은 광주에서 떠나 고창군 부안면(富安面) 수강산으로 들어가 산당에 숨었다가 12월 11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갑오실기}에는 "이 달(12월) 11일에 고창 사민 이봉우(李鳳宇)가 손화중을 체포하여 방금 현옥에 수감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광주에서 12월 1일에 떠난 최경선은 남평에 들려 식량 등을 거두어 가지고 약 2백여 명을 이끌고 동복(同福)으로 내려갔다. 외남면 벽사(碧松)와 차평(沙坪)이란 큰 마을에 이르게 되어 유숙하자 이 사실을 알게된 오위장을 지낸바 있는 오윤술(吳潤述)이 이교(吏校)와 민병 300여명을 동원하여 4일 새벽 동이 틀 무렵 고단하게 자고 있는 동학군을 기습하여 많은 인원을 사살하고 최경선 대접주 등을 체포하였다. 오윤술의 기록에 의하면 "157명을 포살하고 거괴 최경선과 이형백, 차괴 장운학, 박건량, 김중회, 김병혁등 및 따라다니던 62명을 체포하였다.

    거괴 최경선은 일본군에 넘겼으며 일본군은 서울로 압상하였다. 이형백은 나주 초토영으로 압상하고 장운학과 62명은 읍에서 참작하여 처분하라"고 명하였다. 최경선 대접주는 일단 단양으로 끌려갔다가 12월 7일 전주로부터 내려오는 일본군에 넘겨져 전봉준 장군과 같이 나주로 끌려갔다. 동학군이 해산하자 나주목사 민종렬은 종적을 감춘 동학군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는 초토사의 이름으로 전라도 53개 전군현에 동학 잔당을 잡아들이라고 엄명을 내렸다. 뒤이어 일본군도 나주로 들어와 본영을 두고 동학군 토벌을 쥐휘 하였으며 양호좌선봉 대장 이규태와 우선봉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도 들어와 명실공히 나주성은 토벌군의 총본산이 되었다. 8. 결론 일본군은 1월 5일(12월 10일)에 나주성에 들어와 임시로 본부를 설치하고 군수물자를 공급하였고 동학군 토벌을 위한 병력을 지휘하였다.

    일단 토벌을 마친 2월 5일에는 모두 이곳으로 모여 각지에서 체포한 동학군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임시재판소와 같은 것을 두어 등급을 매긴 다음 대부분 학살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12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학살에 들어갔는데 "훗날 재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다소 살벌한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공사와 사령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우리 나라를 침략하는 데 장애가 되는 동학의 조직력을 완전히 파괴하려고 이와 같은 잔학행위를 한 것이다.

    {김낙철역사}에 의하면 부안에서 체포된 김낙철 대접주는 나주로 끌려와 엄청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기술하였다. 31명이 잡혀왔는데 나주에 도착하자 몽둥이와 철편으로 2시간씩 구타하여 어깨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고초를 당하고 다시 수성군에 의해 한 차례 더 구타당하고 나서 진영 토굴 감옥에 들어가니 많은 동학군들이 삼단같이 쓸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27명은 곧 총살해 버렸다는 것이다. 나주 수성군의 잔학행위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본군의 보고에 "수성병들이 동학도들에 대한 행위를 살펴보니 잡히는 대로 죽여버리고 정상을 조금도 참작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학도 때문에 두 번에 걸쳐 두텁게 포위되어 격렬히 공격을 받았으므로 분한 나머지 그와 같이 잔인하게 복수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 특히 나주성 밖에서 많은 시체를 보게된 것은 이 때문이라" 하였다. 전라도 각지에서 체포된 무수한 동학군들은 현지에서 학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곳에 끌려와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엄청나게 학살되었다. 남고문 앞에 있는 지금의 나주 초등학교 자리가 나주영문 토굴감옥이 있었다 한다. 나라를 바로잡고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려 죽창을 들고 일어섰던 많은 동학군은 통한의 최후를 여기 나주에서 맞았던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