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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리교사연구자료

    전라도 서남부 혁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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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웹마스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236회   작성일Date 11-09-08 15:50

    본문

    (교사교리연구 제 8호 - 포덕 141년 10월)

    표 영 삼

    ◇ 사진설명; 무안군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청계면 청천리 마을. 1894년 6월에 무안 대접주 배규인은 이 마을 재실(서당)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에 힘을 기울였다 한다.

    사진설명; (위) 해남군 읍내전경. 1894년 6월부터 해남동학군은 읍내 남동리에 집강소를 설 치하고 폐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아래) 1892년에 나주 접사 나치현이 진도에 들어와 처음 포덕하였던 의신면 만길 자라머리 마을. 나봉익과 양순달이 입도하여 포덕에 힘써 진도에 동학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1. 무안, 해남, 진도의 초기활동

    전라도 남서부 지역인 무안, 해남, 진도 지역에 동학이 처음 전파된 것은 1890년경으로 여겨진다. 1930년대에 작성된 {천도교보(天道敎譜)}에 의하면 대체로 1893년에 입도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1924년 이후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에 실린 환원(還元, 사망)기사에도 오래된 입도자는 역시 1890년으로 나타나 있다. 1920년대에 작성된 자료이므로 이미 환원(還元, 死亡)한 사람들은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많아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라도 일대에 동학이 엄청나게 늘어난 시기는 1892년의 삼례교조신원운동과 1893년의 광화문 앞 교조신원운동, 보은과 전라고 원평(院坪)에서의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이 벌어진 때라고 여겨진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고 부르짖으며 사람을 평등하게 한울님처럼 대하는 도인들의 몸가짐은 민중들에게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게 충분하였다. 전라도 서남부 지역인 무안(務安), 해남(海南), 진도(珍島)에 동학이 자리잡은 것은 역시 1892년이었다고 생각된다. 1920년대의 기록에 남아 있는 입도자를 보면 무안군(務安郡) 김의환(金義煥)은 1892년 7월 17일에, 이병경(李秉烱)은 1892년 11월 7일에, 청계면 남성리 조병연(趙炳淵)도 1892년에, 청계면 남안리 이병대(李炳戴)는 1892년에 , 청계면 도림리 고군제(高君濟)는 1892년에, 석고면 당호리 한용준(韓用準)은 1892년에, 남리의 함기연(咸奇淵)은 1892년에 입도하였다. 그리고 청계면 상마리 송두욱(宋斗旭)과 송두옥(宋斗玉)은 1893년에, 장산면 각두리( 頭里) 장도혁(張道爀)은 1893년에, 청계면 청계리 한택률(韓澤律)은 1893년에, 청계면 하마리 송군병(宋君秉)과 박인화(朴仁和)는 1893년에, 외읍면 교촌리의 정인섭(鄭仁燮)은 1893년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후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엄청난 수가 입도하였다. 해남군(海南郡)의 경우 김병태(金炳泰)는 1892년 11월 10일에, 김의태(金義泰)는 1893년에, 해남면 해리 홍순(洪淳)은 1893년 4월 5일에, 화원면 인지리 김순근(金順根)은 1893년 9월 18일에, 옥천면 용산리의 김원태(金源泰)는 1892년에 입도하였다. 이들의 윗대라 할 수 있는 김도일(金道一), 김춘두(金春斗), 김춘인(金春仁), 나치운(羅致雲) 등은 그보다 훨신 앞서 입도했을 것이다. 해남도 역시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엄청난 입도자가 줄을 이었다. 진도군(珍島郡)에 동학이 최초로 전해 진 때는 1892년 1월이었다. {천도교회월보}의 {진도종리원연혁}에 의하면 의신면(義新面) 만길(滿吉)에 사는 나봉익(羅奉益)과 양순달(梁順達)이 나주에서 온 나주접사 나치현(羅致炫)으로부터 도를 받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그 뒤로 많은 사람이 입도하게 되었으며 1894년에는 조도면 남동리 김광윤(金光允)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계속하여 집단적으로 입도하였다 한다. 1893년 3월에 보은과 원평에서 열린 척왜양창의운동 때에는 무안, 남해, 진도 동학도들도 상당수가 참여하였다. {취어(聚語)}에 의하면 "영암, 무안 … 등지에서 260여 명이 3월 30일에 … 차례로 들어 왔다"고 하였다. 관원의 보고에 의하면 4월 3일에 보은 장내리를 떠나간 동학도 수는 "영암접에서 40여 명, 무안접에서 80여 명이 돌아갔다"고 하였다. {취어}에는 또한 "초3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민당들이 돌아간 자로는 전라도 일도의 관읍(官邑)은 알 수 없으나 모두 5천 6백여 명"이라고 하였다. 이 엄청난 수의 동학도 중에는 무안, 해남, 진도의 동학도들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진도종리원연혁}에는 나봉익, 양순달, 이문규(李文奎), 허영재(許暎才)가 참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894년 3월 21일에 백산에서 동학혁명 깃발이 올라가자 무안, 해남, 진도 동학군들은 4월 중순부터 기포하기 시작하였다. 전봉준 장군과 손화중 대접주가 무장 동음치면(冬音峙面) 당산에 모였을 때인 즉 1894년 3월 15일경에 무안의 배규인(裵奎仁, 相玉)과 해남의 김춘두 등은 측근들을 이끌고 참가했다고 보여진다. 그 후 전봉준 장군이 4월 16일(양 5월 20일) 함평을 점령하고 5일간 체류했을 때에는 무안과 해남 동학군들은 대대적으로 기포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부산총영사관 실전의문(室田義文)이 작성한 {동학당휘보} 4월 15일자 초토사전보에는 "그들 무리 절반은 영광에 머물고 반은 함평과 무안 등지로 향하였다"고 하였다. 동학군은 4월 18일 이전에 무안읍을 점령한 것이 사실이다. {동학당에 관한 휘보} 4월 21일자에는 "무안에서 보낸 보고를 접하니 본현 삼내면(三內面) 동학도 7∼8천 명이 절반은 말을 타고 절반은 걸어서 몸에는 갑주(甲胄)를 입고 각기 긴 창과 큰 칼을 지니고 18일에 들어와 하룻밤을 자고 나주로 향했다"고 하였다. 나주로 갔다는 것은 북상했음을 뜻하며 함평에 있는 전봉준 장군과 합류하기 위한 이동이라고 보여진다. 주목되는 것은 무안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으나 관과 충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관이 호의적으로 협조하였거나 이미 전봉준 동학군이 점령하고 있었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반은 함평과 무안 등지로 향하였다"는 초토사의 전보처럼 이미 동학군이 무안을 점령하고 있었다. {전라도 출정군의 위로를 위한 내탕전 하사의 건}이란 문서에는 "동학도는 셋으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영광에 주둔하고 하나는 무안에 주둔하고 하나는 함평에 주둔하면서 서로 연계하며 성원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동학군이 무안을 점령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무안 동학군이 4월 18일에 무안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병사 이문영은 순천과 창평에서 병력 2백명(순천에서 150명, 창평에서 50명)을 동원하여 4월 20일에 무안으로 파송하여 성을 지키는데 돕도록 하였다" 한다. 이들 병력이 무안에 왔으나 이미 동학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역할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삼향면에서 7∼8천명이 올라왔다고 한 것은 배규인(배상옥) 대접주가 동학군을 이끌고 왔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배인규 대접주는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던 삼향면 대양리(大陽里, 大朴山 북쪽에 있는 大月里 마을)에서 동학군을 모아 출발한 후 다시 청계면에 들려 이곳 동학군과 합류하여 무안읍으로 들어왔다. 전봉준 장군이 홍계훈 경군과 싸우기 위해 많은 병력이 필요하여 배인규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는 남해 동학군이나 영암 동학군들도 합류했을 가능성이 없지않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배규인은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라" 하였고 "무안, 장흥 등지의 비괴들은 서로 왕래한" 것으로 되어 잇다. 이것은 배인규가 무안군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영광, 장흥, 해남, 강진 등지에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배규인은 무안 동학군만 모은 것이 아니라 여러 곳의 동학군을 모을 수 있어 7∼8천 명이란 엄청난 인원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무안에 들어와 식량문제 등을 감안하여 정예병력만을 추려 전봉준 장군과 합류한 것이 아닐까 한다. 전주로 내려왔던 홍계훈(洪啓薰) 경군이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것은 4월 18일이었다. 7백 명의 병졸을 이끌고 군산에 상륙했던 홍계훈은 전주로 오는 도중 230명이 도망치자 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불과 4백여 명의 병력으로 동학군을 토벌할 자신이 없어 여러 날 전주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병력보충이 절실하여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4월 17일경에야 총제영(總制營) 중군 황주헌(黃周憲)이 4백명을 이끌고 19일에 인천을 떠나 22일경에 법성포로 상륙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4월 18일에 전주를 떠나 영광을 향해 출병하게 된 것이다. 태인, 정읍, 고창을 거쳐 4월 21일 저녁야 영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봉준 장군은 이 소식을 접하자 벼란간 전군을 출동시켰다. 밤중에 출동한 동학군은 함평에서 동쪽으로 30리 지점에 있는 나산(羅山, 나루뫼)으로 이동하였다. 나산은 장성쪽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전봉준 장군이 급히 나산으로 옮긴 것은 비어 있을 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난파유고(蘭波遺稿)}에는 "이날 밤 함평 진산장(津山場)으로 옮겨갔으며 다음 날(22일) 장성 월평으로 떠났다"고 하였다. 22일 새벽에 나산을 떠난 동학군은 점심 때에 장성 월평장에 도착하여 삼봉 아래 본진을 설치하고 점심을 먹게 되었다. 함평현감은 동학군이 21일 밤에 함평을 떠난 것을 알고 22일 아침에 동학군이 "나주와 장성 쪽으로 이동했다고 홍계훙에게 서둘러 보고하였다. 급보를 받은 홍계훈은 전주공격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이학승(李學承) 대관(隊官)을 장성으로 급파하였다. 이학승(李學承) 대관은 원세록(元世祿), 오건영(吳健永)으로 하여금 병정 300명을 이끌고 동학군의 행진을 막기자 장성으로 달려 갔다. 정오 경 황룡천(黃龍川)에 도착한 이들은 4천여 명 동학군이 월평 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포를 발사하였다. {전봉준공초}에는 "아군이 취식 때 경군이 대포를 쏘아 아군이 4∼50명이 전사했다"고 하였다. 놀란 동학군은 뒷산으로 올라가 관군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기백 명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 전봉준 장군은 전군에 반격을 명령하였다. 동학군은 일제히 황룡강을 건너가 미리 준비했던 대나무 장태를 굴리며 신호리로 진격하였다. 관군은 들판에서 밀려 야산지대인 신호리(辛湖里) 신촌 까치골로 후퇴하였다. 동학군이 삼면에서 이 곳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자 이학승 대관과 5명의 장졸들은 좌왕우왕하다가 전사하였고 나머지 관군들은 정신없이 써쪽 사창고개를 넘어 땅거미가 질 무렵 영광읍에 이르렀다. {양호초토사등록(兩湖招討使謄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2일 묘시(卯時, 오전 5시∼7시)에 함평현감 권풍식(權豊植)의 보고가 도달하여 보니 그들(동학군) 무리들은 우리 고을에서 장성과 나주 등지로 방금 떠나갔다 하며 그들 무리의 원정서(願情書)도 보내왔다. … 대관 이학승·원세록·오건영으로 하여금 병정 300명을 영솔하고 장성 등지에 나가서 다만 그들의 움직임이 어떠한가를 살피도록 하였다. 23일에 따로 군관 장진우과 운량감관 김영태를 법성포에 파견하여 배편으로 내려온 총제영(總制營) 병정을 하륙시켜 음식을 주는 것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 이날 땅거미가 진 후에 출진하였던 병정들이 황망하게 돌아와 보고하기를 아군이 겨우 장성 월평에 도착하자 피도들도 때마침 황룡촌에 도착하게 되어 점점 가까워지자 접전이 벌어져 한바탕 서로 죽이게 되었다. 구르프포를 한방 쏘니 피도들이 맞아 죽은 자가 대략 수백 명이 되었다. 그러자 피도 만여 명은 세차게 달리어 죽음을 무릅쓰고 앞다투어 30여 리나 추격해 왔다. 그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아군은 힘이 빠져 넘어지고 자빠지며 허둥거리다 본진에 돌아 왔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22일 아침에 이학승이 출동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돌아온 날짜는 23일 땅거미기가 진 후라고 하였다. 결국 23일에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난파유고}에는 22일에 전투가 있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투일자는 22일이 분명하며 23일이라 한 것은 오기라고 보여진다. 동학군은 관군이 법성포에 상륙한 지원군과 합류하느라 머뭇거리는 틈을 타서 24일 아침에 장성을 출발, 갈재(蘆嶺)를 넘어 정읍을 거쳐 태인으로 올라갔다. 25일에는 금구 원평에서 일박하고, 26일에는 모악산 서쪽 청도리를 넘어 전주 완산(完山) 앞 삼천(三川)에 진출하였다.여기서 일박하고 27일 아침에 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하오 2시경에 무난히 점령하였다. 뒤 따라 오던 홍계훈 관군은 완산에 진을 치고 성중을 공격할 생각은 않고 이따금씩 대포만 쏘아대고 있었다. 전주성을 빼앗기자 국제정치에 어두운 고종과 민씨 일족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던 일본은 청국군이 출동할 날짜와 일본군이 인천에 도착할 날짜까지 계산에 넣고, 대륙침략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기 위해 즉각 병력출동을 서둘렀다. 인천항에 상륙한 일본군은 먼저 서울을 점거하여 기선을 잡았다. 정부의 경솔한 청국원병은 일본군을 수도 서울에 불려드린 결과를 가져 왔다. 당황한 정부는 차선책으로 현실성이 전혀 없는 일본군 철수책을 내놓았다. 즉 동학군과 화해하여 평정을 이루었으니 일본군은 물러가야 한다고 요청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4월 18일에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된 김학진은 삼례에서 정부의 지시를 받아 동학군과 관군간에 화약이 이루어 지도록 배후에서 활동하였다. 정석모(鄭碩謨)의 {갑오약기}에서는 김학진은 "입성하지 못하고 삼례역에서 관군과 동학군에 사람을 보내 정부의 명으로 화해케 하였다. 이에 동학군이 북문을 열고 나가자 관찰사와 관군이 입성하니 5월 8일이었다"고 하였다. 일단 동학군이 전주성을 빠져 나가자 정부는 일본군의 철수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보다는 강점할 의욕이 앞섰다. 북경주재 러시아공사 카지니가 일본 특명전권공사 대도(大島)와 만난 자리에서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한 내용과 일본측의 답변을 보면 일본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즉 "지금 이 나라에 주재하는 귀궁(일본)의 군대는 귀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하지만, 남쪽 지방의 민란도 이미 평정되어서 오늘에 있어서는 오히려 귀국 군대의 한성 주재로 말미암아 민심이 동요되고 수만 명의 조선 사람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가는 실정이니, 가능한 한 빨리 그 일부라도 귀국시켜 주지기 바란다. … 귀국 군대가 이대로 오랫동안 이 나라에 주둔하면 청국도 역시 부득이 군대를 증파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곧 일본과 청국이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일본측은 "우리 나라는 어민을 제외하고랃ㅗ 3개항과 경성에 1만명에 가까운 거류민을 두고 있으며, 이 나라 외국 무역량의 과반을 우리나라 상인들이 취급하는 것과 관계가 있으므로, 이 번의 민란이 평정되었더라도 향후 이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보장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 개혁안 5개조를 제출하였고 … 약간의 위력을 과시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쉽게 개혁을 당행하잘 것 같지 않다. … 이 개혁안이 채택되지 않 않는 동안은 군대철수는 응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제각기 자기고을로 돌아간 동학군들은 도소를 설치하고 포덕활동에 나섰다. 5월 24일자 일본 {시사신보(時事新報)}에는 "나주의 보고를 보면 5월 9일 적도 수백 명은 인근 무안에 모여 전곡을 약탈하며 여기저기서 난폭하게 행동하자 해당 수재는 다음날 이민(吏民)을 끌고 가서 30명을 체포하고 그들로부터 서책과 녹권(錄卷), 염주, 예물 등을 몰수하여 보내왔다"고 하였다. 당시 무안현감은 보은군수였던 이중익(李重益, 이 해 4월에 부임함)이었으며 동학군 도소 활동을 금하려고 한 것 같다. "전곡을 약탈하며 여기저기서 난폭하게 행동하였다"는 것은 일반 민중들의 전곡을 약탁한 것이 아니라 부자나 탐관오리의 집에 가서 전량(錢糧)을 내놓게 한 것이다.

    2. 구·현에 동학집강소

    의외로 동학군의 요구를 받아들인 정부는 김학진으로 하여금 동학군들과 화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준 것 같다. 동학군과 화평을 모색하던 그는 면·리 단위 집강소를 설치하여 원정을 해결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6월 7일에 각 군현 수재들에게 집강소를 차질없이 설치 운영하라고 지시하였다. 김성규(金星圭)의 {초정집(草亭集)}에는 "너희들은 살고 있는 고을에 가서 … 의로운 사람을 집강으로 뽑아 위법자가 나타나면 포착하여 고을 수재와 상의해서 처리하라. 만일 집강이 전결하기 어려운 일은 관에 보고하면 법대로 포착할 것이다"고 하였다. 당시 행정권이 군·현 수재에게 있었으므로 면·리 단위의 집강은 민정을 해결할 위치 놓여 있지 않았다. 동학군은 대안으로서 군·현 단위의 집강소를 설치하여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갑오약력(甲午略歷)}에는 "6월에 관찰사가 전봉준 등을 감영에 초치하자 … 전봉준은 삼베옷에 메산짜 관을 쓰고 의젓이 들어오니 … 관찰사는 관민간에 상화(相和)할 방책을 의론하고 각 고을마다 집강을 설치하기로 허락하였다" 한다. {오하기문} 6월 조에도 "순창군수 이성렬(李聖烈)은 … 김학진이 여러 번 공문을 보내 지금의 (동학과의) 화해국면(撫局)을 깨뜨리지 말라하여 … 어쩔 수 없이 아전과 백성들은 동학에 기탁하여 도소를 설치하고 집강을 배치하였다"고 하였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관찰사가 군·현 단위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자 각 고을 수재(守宰)들이 딴 생각을 갖지 못하게끔 지방순회에 나섰다. 김개남은 6월 12일경부터 순창, 옥과, 담양, 창평, 동복, 낙안, 순천, 흥양, 곡성 등지를, 전봉준은 6월 중순부터 장성, 담양, 순창, 옥과, 남원, 창평, 운봉 등지를 돌았다. 결국 김개남은 좌도지역을, 전봉준은 우도지역을 맡아 혁명을 이끌어 가도록 합의하고 집강의 활동을 강력히 지원하기로 하고 전주에 도집강소를 만들었다. 한편 전라 남동부지역은 영호대접주 김인배를 순천에 보내어 지도하게 하였고, 남서부 지역은 무안의 배규인으로 하여금 지도하게 하였다. 전라도 남서부인 무안, 해남, 진도 지역은 결국 배규인이 이끌어가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한 지도자들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무안(務安)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많은 인물들이 나서서 활동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天道敎會史草稿)} 갑오년조에는 배규인(裵奎仁), 배규찬(裵奎贊, 배규인의 弟), 송관호(宋寬浩), 임운홍(林雲洪), 정경택(鄭敬澤), 박연교(朴淵敎), 노영학(魯榮學), 노윤하(魯允夏), 박인화(朴仁和), 송두욱(宋斗旭), 김행로(金行魯), 이민홍(李敏弘), 임춘경(林春景), 이동근(李東根), 김응문(金應文)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꼽고 있다. 그리고 <전라도소착·소획동도성책(全羅道所捉·所獲東徒成冊) designtimesp=20860>에는 "배정규(裵正圭), 박순서(朴順西), 김자문(金子文), 정여삼(鄭汝三), 김여정(金汝正), 장용진(張用辰), 조덕근(趙德根)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박기운(朴琪雲), 송두옥(宋斗玉)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9월 재기포 때에는 "배규인은 2천군을 거느리고 무안에서 일어났다" 하였다. {동학란기록} 하(下) <죄인록 designtimesp=20861>에는 박정환(朴正煥)이 접주로 활동하였다. 해남(海南)지역도 다른 지역에 못지 않게 많은 인물들이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김도일(金道一), 김춘두(金春斗)가 기록되어 있으며 {동학사}에는 9월 기포 때에 김병태(金炳泰)가 3천군을 거느리고 해남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 第五)}에는 김신영(金信榮), 백장안(白長安), 전유희(全由禧), 윤주헌(尹周憲), 김형(金 ), 박인생(朴仁生), 김순오(金順五), 박익현(朴益賢), 이은좌(李銀佐), 김숙국(金叔國), 박헌철(朴憲徹). 김춘인(金春仁), 장극서(張克瑞), 이중호(李重鎬), 임제환(林濟煥), 최원규(崔元圭), 윤규룡(尹奎龍) 등이 기록되어 있다. {동학란기록} 하(下) <죄인록 designtimesp=20862>에는 강준호(姜準浩) 접주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동학란기록}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 designtimesp=20863>에는 박창회(朴昌會), 김동열(金東說), 정채호(鄭采鎬), 강서옥(姜瑞玉), 강점암(姜点岩), 성신인(成臣仁), 남처성(南處成) 등이 추가되어 있다. 진도(珍島)지역의 대표적 인물은 김광윤(金光允), 나치현(羅致炫), 나봉익(羅奉益), 양순달(梁順達), 허영재(許暎才)를 위시하여 김수종(金秀宗), 손행권(孫行權), 박중진(朴仲辰)등이다. {동학란기록} 하(下) <죄인록 designtimesp=20864>에는 김중야(金仲也)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순무선봉진등록} 제7에는 이방현(李方鉉), 김윤선(金允善), 주영백(朱永白), 김대욱(金大旭), 서기택(徐奇宅)이 기록되어 있다. 이상은 교중 기록과 관측기록에 나타난 지도자들로서 누락된 인물이 오히려 많을 것이다. 이 중 각 군·현의 대표적 인물을 보면 무안의 배규인은 단연 이 지역에서 으뜸가는 지도자이다. 앞서 본바와 같이 {순무선봉진등록}에 배규인은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라고 하였고 "무안, 장흥 등지의 비괴들은 서로 왕래하였다"고 하여 배규인은 장흥, 강진, 영암, 해남, 진도지역을 왕래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남현은 지형이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어 서쪽 남리지역은 김신영이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동쪽은 김춘두(金春斗)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천도교회월보} 환원란에는 김병태가 김도일로부터 입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김변태의 환원을 간단하게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대표적인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끝으로 진도지역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조도(鳥島)의 박중진(朴仲辰)과 본도의 손행권을 들수 있으나 분명치는 않다. 아마도 의신면 만길의 나봉익일지도 모른다. 진도 성내리에 사는 박주언(朴柱彦)은 "관군과 일본군이 들어오자 일부 동학군들은 의신면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피신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다. 나익본은 제주 양씨인 양순달과 같이 배를 타고 제주도로 피신한 것으로 보이는데 좀더 조사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전라도 서남부 지역의 초기 동학집강소( 또는 都所) 활동은 큰 말썽 없이 운영되었다. 무안에서는 이미 4월 16일경에 전봉준 동학군이 점령하였고 18일에는 배규인 대접주가 7∼8천명을 동원하여 들어왔으므로 관이나 보수세력들은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1994년에 간행한 {무안군사}에는 "동학군이 들어 와 이방 박병길(朴炳吉)을 체포하려하자 나주로 피신하여 그의 사랑채만 불태웠다"고 하였다. 동학군은 박병길을 악질 관리로 지목하였으나 피신하여 사랑채만 불지른 것으로 보인다. 배규인 대접주는 집강소 설치에 앞서 목포진(木浦鎭)을 공격하여 무기를 거둔 다음 무안으로 올라왔다. {순무선봉진등록}의 목포 만호(萬戶) 보고에 의하면 "지난 6월에 전 만호가 있을 때 동학의 무리 수천이 본진에 돌입하여 달려와서 군기를 몽땅 약탈하여 갔다"고 하였다. 전투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 만호는 동학군에게 무기를 순순이 내어주고 약탈당했다고 보고한 것 같다. 집강소는 무안읍에서 10리 가량 남쪽에 떨어져 있는 청계면 청천리(淸川里)에 설치하였다. {무안군사}에는 "청계면 청천리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각지방에 접주를 두어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했다"고 하였다. 무안 군수였던 이중익(李重益)도 동학군에 매우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성록}에 의하면 이 해 8월 25일자에 의금사(義禁司)에서 공납 전곡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무안현감 이중익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압상(押上)하라고 명을 내린 바 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중익 현감은 공납 전곡을 동학군에게 내어주고 역시 동학군에게 약탈당했다고 보고했던 것 같다. 이중익은 1894년 4월에 현감으로 부임하여 9월까지 재임기간 중 동학군과 별다른 마찰 없이 지냈다. 10월에 전봉준 장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재기포할 때 전라도 일대의 동학군 집강소를 통해 많은 군량미와 군수전(軍需錢)을 거두었다. 여기서부터 갈등이 시작되었고 10월에 이응식(李膺植) 현감이 새로 부임하면서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해남에서는 집강소 설치가 순조로웠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활동도 순조로웠다. {도인경과내력(道人經過來歷)}에 보면 "금 6월 12일에 동학군 20인이, 17일에는 2천여 인이, 23일에는 30여 인이, 29일에는 60여 인이, 7월 초3일에는 2백여 인이, 초 8일에는 2백여 인이, 16일에는 2천 2백여 인이, 전후로 지나 간 인원은 4천 7백여 인이었으며 각기 창과 총검을 가지고 입성하여 쏘아대니 기세가 위태롭고 두려웠다"고 하였다. 동학군이 6월 12일에는 현감을 찾아가 집강소 설치문제를 의론한 것으로 보이며, 17일에는 집강소를 설치하는 한편 보수세력들에게 위압을 주기 위해 2천여 명을 동원하여 시위를 벌인 것으로 보인다. 집강(執綱)은 대체로 대접주가 맡는 것이 상례인데 아마도 김춘두가 맡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춘두는 해남읍내 사람이며 많은 동학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집강소는 읍내 남동(南洞)에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7월 16일에 2천 2백여 명의 동학군을 모이게 한 것은 7월 5일 나주성 공격에 실패하자 일부 보수세력들이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이들의 기세를 제압하기 위한 시위행위로 보인다. 그리고 이 날 동학군은 수성군이 무장을 못하게 무기고에서 조총 25자루와 천보총 6자루, 환도 3자루, 화약 5두, 연환 1천 개를 거두어 갔다 한다. 한편 해남 동학군은 집강소 활동을 통해 하층 민중들의 생활고를 극진히 살펴준 것 같다. 즉 {도인경과내력}에 의하면 "윤병사 소봉(所捧) 4천 3백 냥 중에서 1천 1백 십 냥을 민간에 나누어주었고, 5백 냥은 관노사령(奴令)과 각청 남녀 종과 고인(鼓人)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학도인들에게 "제공하는 공찬(供饌) 비용은 6천 4백 82냥 9전 4푼이 소용되었는데 그 중 1천냥은 관아에서 부담하고 나머지는 각 면의 요호(饒戶)들에게 배정하여 거두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도에서는 집강소 설치 이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6월 중순경에 동학집강소가 처음 설치될 때에는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눈치만 보고 있던 보수세력들이 민종렬이 버티고 있는 나주에서 동학군이 엄청난 병력으로 공격했으나 수성군이 이를 무리쳤다는 소식을 듣자 동학군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으며 여러 면에서 비협조적으로 바뀌었다. 동학지도부는 대책을 강구한 끝에 다른 지역 동학군을 불러들여 보수세력을 제압하기로 하였다. 즉 해남, 무안, 그리고 멀리 손화중 관내인 영광과 무장지역 동학군들과 교섭하여 보수세력을 제압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금년 7월에 본부 조도면(鳥道面) 적괴 박중진이 영광과 무장 등지에서 무리를 모아 배를 타고 내침, 성을 공략하고 살해하고 재물을 노략질하였으며 군기도 약탈하고 마을에 계속 머물면서 불을 지르고 가산을 부수며 백성의 재물을 겁탈하였다"고 하였다. 손화중 대접주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한 결과 제대로 무장한 많은 동학군을 배편으로 끌고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부민이나 악질 관리배들의 전곡을 강제로 거둔 것 같다. {천도교회월보}에 의하면 무안, 영암, 해남의 동학군들도 진도성 공격에 참가한 것이 분명하다. 당시 군수는 이희승(李熙昇)이라는 자였는데 동학군의 힘에 놀라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고 행정이 공백에 들어가자 동학집강소는 굶주린 백성을 위해 힘을 기울여야 했다. 후임군수가 부임한 것은 9월 18일이었으며 식량사정이 극에 이른데 대해 "거듭 흉년이 들게(  ) 된 것은 오로지 동학이 창궐했기 때문이다. … 거의 백성들은 부황으로 누렇게 뜨고 창자는 비어 있으니 수직(守直)하기가 불가능했다"고 하였다. 진도 동학집강소는 해산물을 싣고 해남이나 무안 등지로 가서 그 곳 동학도소와 교섭하여 식량을 교환하도록 하여 죽이라도 쑤어 먹게 하였을 것이다. 부안 대접주 김낙철(金洛喆)의 기록인 {용암성도사역사(龍菴誠道師歷史)}에도 이런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진도에 동학이 들어온 경위를 잠시 살펴보면 나주 연원(淵源)의 접사(接司)인 나치현에 의해 의신면(義新面)에 처음으로 전도되었다. {진도종리원연혁}는 1892년 1월에 "나주 접사로 계시는 나치현 씨께서 무슨 봇짐 하나를 짊어지고 … 본군 의신면 만길리를 들어섰다. 첫번 만나기는 나봉익, 양순달 양씨였다. … 얼마동안 지내노라니 … 인내천,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이라는 법설을 끌어내자 … 두 분은 그만 승낙하고 입도하였다. … 얼마 아니 가서 한 사람 두 사람 늘기 시작하여 … 포덕34년(1893년) 계사 2월에 보은 장내리 집회에 나치환, 나봉익, 양순달, 이문규, 허영재 제씨가 참석하였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진도에는 동학군이 늘어났으며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더욱 늘어나 의신면(義新面)과 고군내면(古郡內面), 조도면(鳥島面), 진도면(珍島面)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의신면 만길(晩吉)과 원두( 頭)는 나주 나씨와 제주 양씨들이 사는 집성촌이었다. 여기에 최초로 입도한 나봉익(羅奉益)과 양순달(梁順達)이 살고 있었으며 마을 인근 사람들은 모두 동학을 신봉하고 있었다 한다. 이들은 또한 진도에서도 알려진 부자 마을이었다 한다. 아마도 의신면 동학군들이 진도 동학군을 이끌어 갔다고 보여진다. {순무선봉진등록}의 진도도호부사 보고에 의하면 "고군내면 내동리에 사는 손행권은 금년 7월에 소란을 겁내어 해남으로 도피하였다가 잠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동면 석현리 사는 김수종은 손행권으로부터 사도(邪道)에 물들어 집에 들어앉아 주문(呪文)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고 하였다. 손행권은 동학집강소가 설치된 후인 7월에 남해로 건너가 그 곳 동학군들의 활동을 살펴보고 왔다. 이로부터 포덕에 나섰으며 석현리 사는 김종수는 동학에 입도하여 집에 들어앉아 동학 주문을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던 것이다. 이상 3개 군의 초기 집강소 활동은 대체로 무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학군이 일본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한 9월 기포 이후에는 보수세력의 저항을 받기 시작하여 그들과 대립이 심화되었고 결국 관군과 일본군이 출동하면서 사태는 뒤바뀌었다. 특히 12월에 이르러 무안, 해남, 진도의 동학군들은 민보군과 관군의 엄청난 학살행위로 피를 흘리게 되었다.

    3. 일본군 몰아내려 재기포

    8월 25일 전봉준 장군을 위시하여 김개남 장군, 손화중 대접주 등 전라 좌우도(左右道) 동학군들은 남원에서 대회를 열었다. 6만여 명이 동원된 이 대회에서는 일본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해 재기포(再起包)할 것을 다짐하였다. {갑오실기』9월조에 의하면 김학진은 장계에서 "남원부에 모인 비도는 5∼6만이며 각기 병기를 갖고 밤낮으로 날뛴다. 금구에 모인 무리들도 이미 귀화했다가 어긋난 행실로 돌아섰다", "근일 비도들이 점차 늘어나니 이는 전에 없었던 변으로 임금님의 명령에 항거하며 의병(義兵)이라 칭하니 가히 이를 용서할 수 있으랴"고 하였다. 동학군은 9월부터 장정들을 모집하고 군수전과 군량미 및 군수품을 마련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9월 22일에 김학진 감사가 물러나고 23일자로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가 발령되면서 동학군과 관은 대립하게 되었다. 호서지역에서도 동학군들이 속속 기포하자 10월 6일자로 이승우를 홍주목사로 다시 임명하고 이도재(李道宰)라는 자를 전라감사 대리로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일본 침략군과 정부군, 수성군이 합동으로 동학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나주의 민종렬은 일본군과 관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10월에 접어들면서 초토사로 임명받자 초토영을 설치하고 병력을 보강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전라도 남서부지역에서 가장 먼저 반응한 곳은 진도군이었다. {순무선봉진등록}에 보면 "10월 10일 … 민정 1천 3백 22명을 모아 … 우수영과 힘을 합쳐 남북에 걸쳐 방비하도록 하고 첫째로 무안지역의 사포진에 대처케 하고 두 번째는 영문과 좁은 출입구를 잘 지키도록 하였다"고 한다. 일본군과 관군은 여러 방면에서 동학군을 압박하게 되었다. 11월 11일에 공주성을 공격하던 전봉준 동학군이 월등한 무기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자 전 동학군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틀 뒤인 11월 13일에는 청주성을 공격하던 김개남 동학군도 일본군의 월등한 무기체제에 패배하여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자 각지 보수세력들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전라 우도에 속하는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무기체제가 월등하다는 것을 알고 동학군에 반기를 드는 지역의 보수세력을 먼저 공격하는 전략으로 들어갔다. 이 지역에서 반기를 든 군현은 나주와 장흥, 강진, 병영을 꼽을 수 있다. 무안, 남해, 진도 동학군들은 일본군과 정부군이 내려오기 전에 나주성을 공격하자는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 그리고 함평의 이화삼(李化三)의 뜻에 따라 고막원 일대로 출동하게 되었다. 나주성 공격전략은 북쪽에서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 함평 일부 동학군들이 내리 공격하고, 무안, 해남, 영암, 함평 일부와 강진, 장흥 동학군들은 고막원(古幕院)에 모였다가 남쪽에서 올려 공격하기로 하였다. 무안, 해남, 진도, 함평, 영암, 강진, 장흥 동학군들은 당초의 약속대로 나주 서쪽 30리 지점인 고막포(古幕浦, 咸平郡 鶴橋面 古幕里)와 고막원(古幕院, 羅州郡 文平面 玉堂里) 일대에 11월 15일경에 집결하였다. {금성정의록}에는 "무안군 고막포 등지에 적이 5∼6만이나 모여 있었다. 이들은 서쪽 5개 면에 침입하여 약탈하며 이미 진등참(長嶝站)에 이르러 나주를 공략한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나주목사 민종렬은 북면 용진산에 출동한 수성군을 급히 불러들였다. 그리고 전주에 내려와 있는 일본군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동학당정토약기}에 보면 "나주에 있는 초토사 민종렬이 구원해 주기를 여러 번 청해 왔으나 태인과 기타 지역의 비도를 소탕해야 하므로 다만 회답만을 해주고 말았다"고 하였다. 석현(石峴)전투와 선암(仙巖)전투, 용진산(聳珍山) 전투를 통해 동학군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민종렬은 천보총과 대포로 무장한 포군 300명을 출동시켜 선제공격을 명령하였다. 11월 17일(양 12월 13일) 점심 후에 수성군은 나주를 떠나 20리 지점인 자지재(紫芝峴, 多侍面 佳雲里)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새꼴장(草洞, 多侍面 永洞里)으로 넘어가 유진하였다. 때마침 전왕(田旺)·지량(知良)·상곡(上谷) 등 3개면 민병 2천여 명이 당도하여 큰 힘이 되었다. 이 민병들은 관군의 후위에 배치되었고 "기세만 올리되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18일 아침 동학군은 고막원(文平面 山湖里, 現 古幕院驛) 동쪽 청림산(靑林山, 多侍面 文洞里) 일대와 호장산(虎壯山, 虎長山, 多侍面 松村里), 그리고 진등참(多侍面 동곡리 文洞里)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다. 전투는 수성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수성군은 대포를 쏘아 산에 있던 동학군들을 들판으로 내려오게 한 다음 공격에 나섰다. 동학군은 수다(水多)와 진등 일대에서 숲을 방불케 하리만큼 깃발을 날리며 위세를 떨쳤다. 전투가 개시되자 사면에서 불길이 오르고 포성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수적으로 월등한 동학군은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하였으나 조총과 시석(矢石)으로 무장한 이들은 관군을 대적한지 얼마 안 지나자 적수가 되지 못했다. 수성군은 시석과 조총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서 대포와 천보소총으로 공격하니 동학군은 점점 사상자가 늘어났다. 1시간이 지나자 동학군은 5리 가량 밀려 고막교를 건너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로 후퇴하고 말았다. 추격해 오던 수성군은 유인작전에 말려들까 두러워 급히 철수명령을 내렸다. 전투는 일단 여기서 중단되었고 밤이 되자 대오를 정비한 동학군은 수성군을 공격하려 나섰다. 지형의 불리한 수성군은 고막원 뒤편 호장산 언덕으로 후퇴하였다. 이 날 밤 민종렬은 별안간 수성군을 회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북면 동학군 만여 명이 나주로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불러들인 것이다. 밤중에 병력을 이동하는 것이 위험하여 19일 정오 경에 나주로 돌아왔다. 다시면에는 3개 면에서 강제로 동원한 민병들만 남아 지키도록 하였다. 고막포로 후퇴하였던 동학군은 수성군이 철수하자 11월 19일부터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서창(西倉)으로 가서 세곡을 거두어 들였다. 민종렬은 북쪽 동학군이 움직이지 않자 20일 밤에 포군 50명을 고막포 쪽으로 다시 출동시켜 민병과 합류하게 하였다. 21일에는 도통장 정석진과 도위장 손상문이 포군 3백 명을 이끌고 뒤따라 와서 합류하였다. {난파유고}에는 수성군이 당도하자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였다. 그러자 다시 동학군은 고막산 일대로 후퇴하여 완강히 저항하였다. 날이 저물자 대적하기가 어려워진 수성군은 약 5리 정도 뒤에 있는 호장산(虎壯山)으로 물러났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수성군들은 쓰러질 지경이었다. 마을에서 주식을 얻어다 기갈을 면하게 하고 나서 본진을 먼저 나주로 환군하도록 하였다. … 도통장은 일부 병력을 호장산 후미진 곳에 매복하여 후퇴하는 병력을 엄호하다가 본진이 자지현에 이르자 안심하고 철수하였다" 한다. 이 고막포 전투에서 역시 동학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철수하는 수성군을 보고도 추격하지 못하였다. {진도종리원연혁}에는 앞서 본바와 같이 "나치현(羅致炫) 등 여러 지도자 등이 많은 동학군을 이끌고 고막포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세가 불리하여 후퇴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나치현이 수성군에 체포되어 학살당하였다"고 하였다. 동학군은 당초 북쪽과 서쪽에서 협공한다는 작전을 세웠으나 명령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작전계획에 차질이 생겨 패전하고 말았다. {무안군사(務安郡史)}에는 무안의 일서면(一西面, 현 청계면) 접주 박치상(朴致相)은 나주공격전에 참여했다가 우퇴부에 총상을 입고 돌아와 퇴비더미 속에 숨어 지내다 간신히 살아남았다 한다. 몽탄면 접주 김응문(金應文)도 고막원전투에 참가했다가 후퇴하여 함평 엄다리에 숨었다가 체포 당해 12월 8일에 화형을 받고 순도하였다 한다. 같은 마을 동지였던 김효구, 김덕구, 김영구도 체포되어 12월 12일에 처형되었고 김성권도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아 그 장독으로 죽었다 한다. 그리고 해제면 석용리의 김장현 삼형제도 나주공격에 참여했다가 해산된 후 일본군에 체포되자 자결하였다 한다. 나주성 공격에 실패한 동학군은 장흥 동학군이 금구(金溝)서 내려온 김방서(金邦瑞) 동학군과 능주 및 동복 동학군이 연합하여 12월 4일에 벽사(碧沙)를, 5일에 장녕성(長寧城)을 점령하고 7일에는 강진성을, 10일에는 병영(兵營)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가 회복되었다. 장흥, 강진, 병영전투를 보면 12월 4일 새벽(8시경)에 동학군은 처음으로 함성을 지르며 벽사역관을 공격하였다. 어지럽게 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자 역졸들은 이미 도망가 버려 동학군은 단숨에 점령하여 버렸다. {장흥부사순절기}에는 "4일에 벽사역 공해와 민가는 적들의 화포로 모두 불에 타 재가 되었고, 불길과 연기는 하늘을 덮고 들을 메우니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고 하였다. 장녕성은 서남쪽과 북쪽은 가파른 산으로 둘려 있고 동쪽이 터져 있지만 높은 목책을 쌓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당시 장녕성을 지키던 수성군의 수는 1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박헌양은 성채가 견고하여 수성군이 분전만 하면 능히 방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벽사역이 떨어지자 "성안 백성들은 넋을 잃지 않은 이가 없었다". 박헌양은 동문루에 올라 장병들을 격려하며 방어에 임하였다. 12월 5일 새벽 동학군은 어둠 속을 헤치고 장녕성(長寧城)을 동서남북으로 에워쌌다. 동이 트자 한 방의 포성을 신호로 함성을 지르며 성벽에 달라붙었다. 제일 먼저 북문(連山里 소재)이 무너지자 동학군은 사방에서 성을 타고 넘어갔다. 당황한 수성군은 달아나기에 바빴고 이 광경을 본 박헌양은 문루에서 내려와 동헌으로 들어갔다. 1시간만에 장녕성은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12월 6일에 동학군은 하오 2시경에 강진으로 출발하였다. 새로 부임한 강진 현감 이규하(李奎夏)는 장흥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급한 나머지 6일 새벽에 병영으로 달려가 원병을 요청하였다. 서병무 병사가 난색을 표하자 나주(羅州) 순무영(巡撫營)으로 달려가 청병하였다. 역시 상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어렵다고 하였다. 강진현 관민들은 동학군이 밀려오자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졌다. 수적으로 우세한 동학군은 8시경에 안개를 이용하여 성밑까지 다가갔다. 포성이 울리자 백성과 병졸들은 도망치기 시작하였고 전투는 1시간만에 끝나 읍성은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다음은 병마절도사가 있는 병영(兵營) 공격이었는데 성 둘레에는 목책이 단단하게 설치되어 있으며 병력도 6백 명 정도였으므로 장흥과 강진처럼 간단치 않았다. 동학군에게 유리한 점이 있다면 병사들이 사기가 떨어져 싸울 의욕이 없었다는 것이 한가닥 희망이었다. {박기현일사}에는 "수성군 거의가 겁에 질려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 군무에 무능한 병사도 … 뒷전에 물러나 있으니 수성할 대책이 없었다"고 하였다. 동학군이 공격하자 모두가 도망치기에 바빴다. {오하기문}은 "서병무가 크게 놀라 소매 좁은 두루마기 차림으로 해 가리개를 쓰고 옥로(玉鷺, 갓 머리의 옥장식)는 떼어 감추고 인부(印符)는 가슴에 품고 짚신을 신고 피난민과 섞여 성을 빠져나가 영암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이처럼 장흥 동학군이 대승을 거두자 전라도 남서부지역 동학군들은 사기가 저절로 충천해졌다. 내려오는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결전하려면 장흥에서 결판을 내야 한다고 합의가 이루어졌다. 인근 동학군들은 장흥 동학군의 집결지인 남면(용산면) 어산(語山)으로 모여들었다. 이 곳은 장흥 남동부 20리 지점에 있으며 강진 동부(칠량, 대구, 마량)가 연결되어 있는 지역으로 지방 동학도가 많아 수만 명이 숙식할 수 있는 곳이다. 영암·해남 동학군들도 벽사와 장흥·강진이 함락되자 천여 명이 기포하여 관아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7일에 강진을 연달아 함락하자 그 여세가 더욱 창궐, 본읍(영암)도 침범하리라 하니 성중 이민(吏民)이 힘을 합쳐 주야로 방비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나 중과(衆寡)의 세가 커서 걱정이 많다"고 하였다. 해남 동학군들도 병영이 함락되자 크게 고무되어 수 천명이 기포하였다. 무안지역 동학군들도 12월 8일에 수천 명의 동학군을 무안 삼향면 대월리(大月里)에 집결시켰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12월 8일에 무안경내 동학배들 수천 명이 대월리 앞에 모였다가 경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거의 해산하였다"고 하였다. 12월 8일이면 동학군이 장흥을 수중에 넣은 뒤이며 강진성이 떨어지던 날이다. 배규인 대접주는 경군과 일본군이 내려온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해산하려면 무엇때문에 수천명을 집결시켰을까. 아마도 수백 명의 젊은 장정들을 추려서 장흥으로 가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일본군은 벽사·장흥·강진·병영이 동학군 수중에 들어갔다는 급보를 받자 후비보병독립 제19연대(後備步兵獨立第19聯隊) 대대장인 남소사랑(南小四郞)은 즉각 병력을 파견하였다. 일본군과 경군은 세 갈래(三路)로 강진을 향해 내려가도록 하였다. {동학당정토약기}에는 "3개 지대 중 우측 지대는 강진에서 비도와 싸우느라 약간 늦어졌다"고 하였다. 전투지가 강진 어디였는지는 기록이 없다. 동원된 병력은 경병 약 120명과 일본군 약 250명으로 모두 370명 정도였다고 추산된다. 병영에서 철수한 이인환·이방언 동학군은 남면 어산촌(語山村)에 주둔하였고 나머지 소수 병력은 장흥 남문 밖 건산(巾山) 모정등(茅征嶝)에 주둔하고 있었다. 어산촌 묵촌은 이방언 대접주가 살고 있던 곳이었다. 다른 지역 동학군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처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장흥에서 벌어졌다. 황수옥에 의하면 12일에 장흥으로 와서 하루를 자고 13일 새벽에 일본군과 힘을 합쳐 (남문 밖에 있는 동학군을) 몇 차례 공격하자 적들은 흩어졌다고 하였다. 동학혁명 중 최후 전투라 할 수 있는 장흥 지역 전투는 13일에 막이 오른 것이다. 뒤이어 15일에는 석대벌 전투, 17일에는 옥산촌(玉山村) 전투로 이어지면서 일본군의 야만적 살인행위가 시작되었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13일 새벽에 적세를 탐지하니 남문 밖에 수천 명이 집결해 있었다. 일본군과 본영 병정 30명이 합세 공격하니 수합(數合)이 못되어 적은 사방으로 달아났다. 세차게 추격하여 20여 명을 포살하니 나머지는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장흥에 주둔하였던 일부 동학군은 화력이 약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남면 어산촌 본진으로 후퇴한 것이다. 어산촌(語山村)에 집결한 동학군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 약 3만 명은 넘었을 것으로 본다. 이인환·이방언 대접주와 인근에서 참여한 쟁쟁한 동학지도부는 여러 대책을 검토한 끝에 15일 새벽에 일본군을 선제 공격하기로 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 이진호(李珍鎬) 교도대장 보고에 의하면 12월 15일에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으나 때마침 백목(白木誠太郞) 중위가 일본군 지원부대를 끌고 오게 되자 역습을 받고 석대벌로 밀리면서 자울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동학군이 사살 되었다고 한다. 15일 … 장흥에 도착하여 … 부대를 주둔시키고 잠시 휴식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비류 3만 명이 봉우리 아래에서부터 북쪽 뒤골짜기 주봉에 이르도록 만산편야(滿山遍野) 수십리에 걸쳐 봉우리마다 수목 사이에 깃발을 줄줄이 꽂고, 함성을 지르고 포를 쏘며 충살(衝殺)코자 날뛰는 기세가 대단하였다. 그러자 주민들은 허둥대며 어찌할 줄 몰라 분주하였다. 일본군 중위와 상의하여 통위병 30명(백낙중, 필자 주)으로 주봉의 적을 물리치게 하고, 본대 병정은 일본군과 같이 성모퉁에 있는 죽림(竹林)에 잠복하였다. 그리고 먼저 민병 30명을 출동시켜 싸우게 하여 들판으로 유인해 낸 다음 충성을 떨치려는 병졸들을 두 갈래로 나누어 총을 쏘며 공격하자 잇달아 (동학군) 전열이 무너지므로 전진 또 전진하여 공격하니 포살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노획물은 크고 작은 대포 4문과 회룡창 한 자루, 나머지는 활과 화살, 화약과 총탄 및 잡기들이었으며 모두 태워버렸다. 20리 지점인 자울재까지 추격하자 해는 서산에 걸려 있고 북풍 찬바람이 불어오고 병졸들은 허기진 기색이었다. 또한 남쪽을 바라보니 골짜기가 깊고 비스듬하게 구불구불한데다 대숲이 빽빽하여 잘못될 염려가 있어 곧 본진으로 철수하였다. 성암(聲菴) 김재계(金在桂)의 증언에 의하면 12월 15일에 어산촌에 본진을 둔 "이인환·이방언은 보성, 장흥, 강진, 해남, 영암 각 군의 포(包)를 합하여 … 북상(나주)을 도모하던 때에 정부군과 일본군이 장흥에 내주(來駐)했다는 소식을 듣고 … 수십만 동학군을 지휘하여 장흥읍으로 직충(直衝)하다가 석대벌(石臺坪)에서 결전을 벌였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했으나 일본군의 계략에 빠져 산림지대에서 평지로 나오게 되자 전세는 불리하게 뒤바뀌었다. 월등한 화력을 가진 일본군과 경병은 동학군이 접근할 수 없는 거리에서 사격하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석대벌에서 송정리로, 다시 자울재로 옮기면서 약 4시간에 걸쳐 혈전을 벌였으나 동학군은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패하였다. 일본군과 경군은 날이 어둡자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후퇴한 동학군은 장흥에서 남쪽 40리 지점인 고읍 대내장(竹川場, 玉山)까지 물러섰다. 4∼5천 명이 집결하여 다시 결전을 벌이기로 하고 진을 쳤다. 일본군과 경군은 17일 오후에 나타났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17일 … 남면 40리 지점에 있는 대내장에 이르러 남쪽을 바라보니 왼쪽에는 바다가 펼쳐 있고 산천은 험준한데 어찌된 일인지 비류 4∼5천명이 모여 있으며 옥산 일대에도 진을 치고 있었다. 때로는 함성을 지르고 때로는 포를 쏘며 여전히 날뛰었다. 대오를 정돈하여 일제히 공격하니 적의 무리는 크게 패하여 포살자가 1백여 명이요 생포자가 20여 명이나 되었다. 그 중 10여 명은 효유해서 방면하고 나머지는 포살하였다. 5리 남짓 쫓아가다가 때마침 풍설이 대작하고 황혼이 깔리며 밤이 되어 곧 돌아 왔다"고 하였다. 관산읍에 사는 손동옥(孫東玉)의 증언에 따르면 "동학군과 일본군은 고읍천(古邑川)을 사이에 두고 3∼4시간 싸우다가 동학군이 패했다. 총소리에 놀란 옥산 주민들은 남쪽 뒷산으로 피신하자 온 산이 백산이 되었다. 일본군은 민간인에게 총격을 퍼부어 무고한 주민들이 사살되었다" 한다. 동학군은 다시 패해 해남과 진도쪽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장흥과 강진 출신 동학군 지도자들은 천관산(天冠山)과 여러 산중으로 숨어들었으나 무안과 해남 지역에서 온 지도자들은 일단 해남과 진도 쪽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12월 17일 대내장(竹山場)전투 이후 완전히 해체된 동학군은 일본군의 학살행위로 각지에서 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다. 일본군 현지 지휘자의 학살행위가 아니라 일본 공사와 군 수뇌부가 결정한 학살방침이었다. {동학당정토기}에 의하면 "장흥·강진 부근 전투 이후로 많은 비도를 죽이는 방침을 취하였다. 이는 소관 한 사람의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훗날에 재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소 살벌하다는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공사(公使)와 사령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흥 근처에서는 인민을 협박하여 동학도에 가담시켰기 때문에 그 수가 실로 수백 명에 달하였다. 그래서 진짜 동학당은 잡히는 대로 죽여버렸다"고 하였다.

    4. 동학군의 비참한 최후

    일본군은 조선침략에 장애가 되는 동학군을 철저히 수색하여 괴멸시킬 작전을 폈던 것이다. 한 곳에 며칠씩 주둔하면서 민병들에게 색출하도록 강요하여 잡히는 대로 포살하게 하였다. 만일 동학도를 비호한 사실이 드러나면 엄중히 처단한다고 위협하자 민병들은 마을 단위로 동학군 색출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색에 나섰다. 현지에서 처형한 동학군은 "해남 250명, 강진 320명, 장흥 300명, 나주 230명이고 기타 함평, 무안, 영암, 광주부, 능주부, 단양현, 순창현, 운봉현, 장성현, 영광, 무장 각지에서도 모두 30명 내지 50명 정도씩 잔적(殘賊)을 처형하였다"고 하였다. 무안, 해남, 진도 세 고을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은 해남이었다. 무안, 해남, 진도의 순으로 피해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안지역에서는 동학군 활동이 대단했으나 다른 군에 비하여 희생자는 50명 정도에 그쳤다.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에 의하면 "무안읍은 연안 구석 후미진 곳에 있어 교화의 덕택이 미치지 못하여 동학배가 창궐하자 압박받아온 자는 요행이라 하였고 즐겨 따르는 자는 이제 시운을 탔다고 하며 거침없이 혼란스럽게 휩쓸려 평민으로서 물들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순무사정보첩}에 의하면 "무안은 비류의 소굴로서 거괴들도 많았다. 그래서 수성군을 설치하고 각 면의 민정(民丁)들과 힘을 모아 접주만 70여 명을 붙잡았으며 이밖에 누망자도 많았다. 본관은 민원에 따라 30명을 처단하고 40명은 가두게 하였다. 거괴 중에는 배상옥과 배규찬 형제가 들어 있는데 무안읍의 거괴일 뿐만 아니라 하도(전라도 서남) 연해읍에서는 괴수라고 칭해왔으며 김개남,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에 견줄만한 적괴였다. 상옥은 달아나 놓쳐버리고 규찬만 잡아 가두었다가 군민을 모아 효수하면서 괴수 9명도 아울러 포살하였다. 그리고 수감한 모든 자들은 본현에서 경중을 가려 처리하여 보고하라고 명령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전라도소착 소획동도성책(全羅道所捉所獲東徒成冊)}에 의하면 "12월 8일에 접주인 배정규(裵正圭)와 박순서(朴順西)를 체포하여 즉시 포살하고, 동당 서여칠(徐汝七) 등 6명도 체포하여 경중을 가려 처분하로록 하였다. 9일에는 적당 19명을 잡아 그 중 거괴인 김응문(金應文), 김자문(金子文), 정여삼(鄭汝三), 김여정(金汝正), 장용진(張用辰), 조덕근(趙德根)은 심문을 마치자 죽여버렸고 나머지 12명은 경중을 가려 처분하라 하였다" 한다. 접주급인 김응문, 김자문, 정여삼, 김여정, 장용진, 조덕근 등은 혹독한 고문으로 물고 당한 것이다. 간신히 피신했던 무안 대접주 배인규도 해남 남쪽 바닷가인 은소면(현 松旨面)에서 윤규룡(尹奎龍)이라는 자에게 붙잡혀 일본군에 넘겨졌다. 일본군 대위 송목(松木保一)은 배규인을 12월 24일에 포살하고 윤규룡에게는 1천냥의 포상금을 주도록 하였다.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에도 윤규룡은 기재되게 되었다. {일본사관함등(日本士官函謄)}에는 송본(松本) 장교가 잡혀온 배규인가 당당한 품위를 보고 과연 거괴라고 하였다 한다. 그리고 배규인(상옥)의 동생인 배규찬(裵奎贊, 相五)은 무안 삼향면에서 오한수(吳漢洙)라는 자에게 체포되어 앞서와 같이 무안에서 포살 당했다. 윤석호(尹石浩) 청계면 접주도 체포되어 학살 당했다 한다. 성암(成菴) 송두옥(宋斗玉)은 청계 상마리 사람으로 살아남아 천도교활동을 하였으녀 노영학(魯榮學)과 박인화(朴仁和)도 살아 남아 후일 목포교구장을 지냈다 한다. 보수세력들은 일본군과 관군이 동학도를 색출하여 체포하라는 명을 내리자 떼를 지어 다니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동학도로 몰아 재물을 약탈하는 사례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하도 민폐가 심하여 관군마저 이런 일을 못하도록 금하기도 하였다.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 12월 14일조에 의하면 "어제 행진하다 나주 삼향 민병들이 동학도를 잡는다고 10명, 100명씩 떼를 지어 연도에 널렸음을 보고 불러다 횡포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엄중히 지시하였다"고 하였다. 다음은 해남지역을 살펴보면 일본군이 기록에 동학군 250여 명을 살해했다 하였으므로 어느 곳 보다 많은 희생자를 냈던 곳이다. 장흥 전투와 대내장 전투가 벌어지던 그 때 해남 동학군 중 남리 대접주 김신영(金信榮)과 삼촌면 접주 백장안, 산림동(山林洞, 현 平活里) 교장 윤종무(尹鍾武) 등은 12월 16일에 천여 명을 동원하여 우수영을 공격하려고 남리역에 모였었다. 그러나 관군이 도착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일본사관함등}에 보면 동학군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3∼4차례나 우수영에 출몰하였다 하며, 지금(12월 17일) 해남과 무안 등지 동학군들이 우수영을 점령코자 압박하고 있을 때 마침 본대가 도착하였다. … 겉으로 보기에는 우수영이나 해남에는 동학군 집단은 없으며 소위 우두머리들은 이미 도피하였다. 각읍에서 붙잡지 못한 적도들은 연해의 여러 섬으로 숨어들었다고 하였다. {천도교회월보}에 의하면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우수영에서는 동학도 수백 명을 잡아 가두자 해남의 김병태(金炳泰)는 수사인 이규항(李奎桓)을 찾아가 설득하여 전원 석방시켰다 한다. 그리고 12월에는 수성군의 눈을 피해 밤중에 배를 타고 제주도로 건너가 절연지도에 숨었다가 … 동학도 10여 인을 만나 다시 배를 타고 진도의 구자도(枸子島)로 건너와 숨었다가 살아났다 하였다. 우수영을 점령하지 못한 해남 대접주 김춘두를 비롯한 여러 접주와 무안과 북쪽에서 내려온 동학군들은 해남읍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8일 저녁부터 해남읍성 밖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19일 새벽인 야반에 통위영병이 당도하게 되어 전투를 벌어져 8∼9명의 전사자가 생기자 해산하고 말았다. {순무선봉진등록}에 따르면 통위영병이 "12월 18일 밤 축시(2∼3시 사이)경에 행군하여 해남현 근경에 이르러 적정을 탐문하여 보니 동학군 1천여 명이 성 외곽에 집결해 있었다. 2개 소대를 둘로 나누어 접근시키자 그들이 수 삼차 방포하며 저항하였다. 경군이 일제히 응사하며 공격하자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으며 8∼9명이 사살되었다"고 하였다. 하루만 빨리 공격했더라면 동학군은 해남성을 무난히 수중에 넣었을 것이다. 통위병정은 12월 19일에 해남에 들어왔으며 일본군은 21일과 22일에 들어왔다. 동학군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많은 인원이 산중이나 섬(海島)으로 피신하였다. 20일부터 동학군 색출에 들어가 모사였던 전유희(全由禧)와 남리역 대접주 김신영이 삼촌면(三寸面, 현 三山面)에서 지방민에게 체포되었으며 접주 윤주헌과 교수(敎首, 敎授) 김동, 박인생도 체포되었다. 김신영과 윤주헌은 일단 해남읍에 가두었고 김동과 박인생은 즉시 포살하였다. 또한 같은 날인 22일에 이도면(梨道面) 접주 김순오(金順五), 교장박익현(朴益賢), 집강 이은좌(李銀佐), 별장 박사인(朴士仁), 교수 김하진(金夏振) 등 5명도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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