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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병희 통령과 동학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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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웹마스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806회   작성일Date 11-09-08 15:51

    본문

    (교사교리연구 제 9호 - 포덕 141년 12월)

    <표 영 삼>

    머 리 말

    1894년 9월 18일(양 10월 16일)에 신사 해월 최시형(神師 海月 崔時亨, 1827년. 이하 海月선생으로 약함)이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기포령을 내리자 호서 지역에서도 일제히 일어났다.

    처음 기포한 곳은 음성군 만승면 광혜원(廣惠院, 당시는 鎭川郡)이었다.

    얼마 후 음성 삼성면 황산(黃山)에 있는 충의포 도소(忠義包都所, 大接主 孫秉熙, 1861년. 혁명당시 34세)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혁명운동을 시작하였다. 손병희 대접주는 10월 6일 괴산전투를 치루고 보은으로 갔다가 10월 12일에 청산(靑山縣, 옥천군 청산면)으로 내려가 해월 선생을 만났다.

    해월 선생은 손병희에게 통령의 직임을 주고 논산으로 가서 전봉준 장군과 합류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라는 명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손병희는 논산으로 떠나 10월 16일에 전봉준 장군과 합류함으로써 호남·호서 동학군은 하나가 되어 공주성 공략을 벌이게 되었다. 동쪽의 곰티에서 서쪽의 우금티에 이르기까지 30리에 걸친 전선에서 10월 23일부터 혈전의 막은 올랐다. 그러나 무기의 열세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11일에 노성까지 물러서게 되었다. 손병희 통령은 전봉준 장군과 생사를 같이하여 논산, 전주를 거쳐 원평에 이르러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고 11월 25일에 다시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역시 무기의 열세로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태인, 정읍, 순창 복흥을 거쳐 임실 갈담(葛潭)으로 넘어왔다. 여기서 해월선생을 모시고 장수, 무주, 영동, 황간을 거쳐 보은 북실에 이르렀다. 11월 17일 밤부터 18일까지 민보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세칭 북실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패하여 금왕 되자니로 가서 마지막 전투를 벌인 다음 호서 동학군은 끝내 해산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손병희 통령이 광혜원에서 기포한 이후의 행적과 전투과정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1. 충의포 황산서 기포 해월 선생은 보은 대도소에서 9월 18일(양 10월 17일)에 기포령을 내렸다. 이에 앞서 호남 호서 동학지도자들은 9월 11일부터 12일까지 이틀간 전라도 삼례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재기포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재기포(再起包) 하기로 의견을 모은 바 있다. 이에 따라 해월 선생도 기포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의하면 "후보(後報)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 원이 도유(道儒)의 전 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海月)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 경상도 사투리로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지 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이었다. 각지에서 와 대령하고 있던 대접주들은 물 끓듯이 상기를 띠고 물어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7월경까지만 해도 해월 선생은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여왔다. "근일 교도가 혹 가탁 관리하고 탁명 수간( 奸)하야 도처 사악(肆惡)에 경외의 심이 불소하니 틈심해당(闖甚駭 )한지라 성훈에 왈 인시천(人是天)이라 하고 우왈 타인(打人)이면 타천(打天)이라 하였으니 피아를 물론하고 균시(均是) 천주를 시(侍)한 동포이니 설혹 유과(有過)할지라도 절물(切勿) 구타하고 자관(自官) 재결함을 유지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이러한 해월 선생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다놔여 결단을 내린 것이다.

    백범은 황해도로 내려가다 광혜원에 들렸을 때 동학군이 기포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즉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었다. 광혜원 장거리에 오니 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앉히고 짚신을 삼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고 하였다. 김구(白凡) 일행이 광혜원을 지난 것이 22일쯤이므로 이 곳 동학군들은 9월 20일경에 모이기 시작한 것 같다. 이 때 일부 관원과 유림세력들은 동학도를 가혹하게 탄압하여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다. 진천군의 허문숙(許文淑)과 조백희(趙百熙), 지평(砥平)의 맹영재(孟英在)를 꼽을 수 있다. 맹영재는 8백 명의 토병을 모아 강원도 홍천, 횡성, 지평, 원주 지역에서, 허문숙과 조백희는 토병 5백을 모아 진천, 괴산지역에서 동학도들을 학살하였다 한다. 한편 김홍집 내각도 9월 22일(양 10월 20일)에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임명하고 순무영(巡撫營)을 창설하게 하였으며, 각 군현에는 민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초멸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두황(李斗璜)을 죽산부사로 임명하는 한편 장위영(壯衛營) 영관으로 임명하였고 성하영(成夏泳)을 안성군수와 경리청(經理廳) 영관으로 임명하여 출동시켰다.

    그리고 일본군도 출동준비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포한 동학군은 우선 무장을 갖추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양호우선봉일기}에 의하면 9월 25일에 음죽(陰竹) 관아를 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였다 하며 29일에는 진천 관아를 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였다 한다. 진천 관아에 쳐들어 간 동학군은 안성과 이천 동학도하 하였다. 안성과 이천 관아 무기는 벌써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서 기포한 동학군들은 3개소에 모여 있었다. 진천, 이천, 안성, 여주, 음죽 동학군들은 광혜원에, 손병희 충의(忠義)대접주 휘하 동학군과 강원도 일부 동학군들은 황산(黃山, 현 음성군 금왕읍 황새마을)에, 충주 신재련(辛在蓮, 載淵) 접주 휘하의 동학군들은 보들(洑坪, 현 금왕읍 도청리, 신평리 일대)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10월 초에 충의대도소(忠義大都所)의 대접주 손병희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게 되었다.

    {천도교회사초고}에 의하면 황산에 모인 인물은 광주의 이종훈, 황산의 이용구, 충주의 홍재길(洪在吉)과 신재연(辛載淵), 안성의 임명준(任命準), 정경수(鄭璟洙), 양지의 고재당(高在堂), 여주의 홍병기(洪秉箕), 신수집(辛壽集), 원주의 임학선(林學善), 이화경(李和卿), 임순호(林淳灝), 이천의 김규석(金奎錫), 전일진(全日鎭), 이근풍(李根豊), 양근의 신재준(辛載俊), 지평의 김태열(金泰悅), 이재연(李在淵), 광주의 염세환(廉世煥), 횡성의 윤면호(尹冕鎬), 홍천의 심상현(沈相賢), 오창섭(吳昌燮) 등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 음죽의 박용구(朴容九)를 비롯하여 여러 명이 있었다. 이들이 이끌고 온 동학군은 수만 명이라 하였으나 약 1만 명은 되었다고 여겨진다. 2. 호남·호서 동학군 합류 황상 도소에 수만 동학군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선유사(宣諭使) 정경원(鄭敬源)이 10월 4일경에 포군 5백 명을 이끌고 황산으로 출동하였다. 5리 밖인 사창(社倉)에 주둔하게 되자 경기도 편의장인 이종훈는 그를 직접 찾아가 싸우지 않고 서로 물러서자고 담판을 벌였다. 정경원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동학군 측은 당초 계획대로 보은으로 이동하였다.허문숙과 맹영재도 출동했으나 동학군이 엄청난 것을 보고 물러가고 말았다.

    충의포 동학군은 10월 6일에 황산을 출발, 괴산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괴산읍 인근에 이르자 수성군과 일본군이 총격을 가해 왔다. 동학군은 이들의 저지를 받고 몇 시간을 교전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보은군 장내로 왕할 차로 괴산으로 향할새 괴산 쉬( )가 충주에 주둔한 일병 수백 명을 요청하여 도중을 시살( 殺)하니 피차에 살상이 막심하였다. 일병이 충주병참으로 귀하거늘 도중이 일제히 괴산읍내에 입하여 일야를 경하고 익일에 보은 장내로 출발할새 괴산 쉬 본군 거 서접주 모를 포착하여 군민으로 하여금 타살한지라 기자 13세 아가 부수(父讐)를 복키 위하여 읍내에 방화하니 관청과 민사 수백 호가 회신(灰燼)하였더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이와는 달리 "지난(11월) 3일(음10월 6일) 원전(原田) 소위가 2개 분대를 인솔하고 충주에서 괴산지방까지 정찰하던 중 적군 약 2만 명을 만나 격전을 벌이다 겨우 다음날(4일) 오전 6시에 충주로 돌아왔고 원전 소위 이하 4명이 부상, 사병 1명이 즉사했다고 가흥병참사령부로부터 전보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전투는 저녁 때에 벌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일본군의 피해는 5명의 사상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동학군 측도 심중(甚衆)한 사상자가 있었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10월 6일에 이르러 동학도 누 만 명이 두 길로 나누어 살분(殺奔) 입경하였다. 이때 일본군 25명이 지나다가 북쪽에서 동학도가 오는 것을 보고 다가갔으며 남쪽으로 들어오는 적은 수성군이 맞아 싸웠다. 동학도는 많고 수성군은 적어 버틸 수가 없어 남쪽 전투는 불리하게 되었고 북쪽에서도 역시 패하여 일본군 1명이 사망하였다. 수성군과 부민도 11명이나 죽었으며 창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은 자도 30여 인이나 되었다. 그리고 읍하 5동의 민가도 5백여 호가 불타버렸고 관아 공해들도 모두 부서졌으며 오직 객사만 남았다. 군기나 즙물, 문부는 불살라졌고 환곡 40석과 공전 8천여 금도 빼앗겼다"고 하였다.

    7일 아침 일본군이 철수하자 동학군은 괴산에 들어가 하루를 쉬고 8일에 보은 장내리로 갔다. 여기에 있는 민가 200호와 인근 마을에 있는 민가로 분산하여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옥녀봉 아래 천변 일대에 4백여 개소의 초막을 치고 유숙하였다. 다시 충경포(忠慶包, 보은 동학군)와 문청포(文淸包, 문의 및 청주) 동학군이 합류하여 2만여 명으로 늘어나자 12일에는 해월 선생이 있는 청산으로 내려 갔다. 이 지역 동학군과 영동, 옥천 동학군까지 동원되어 대기하고 있었다.

    근 3만 명에 이르는 동학군은 청산일대 여러 마을에 포진하고 있었다. 해월 선생은 각 포 두령에게 "지금은 앉아서 죽움을 당하기 보다 일어나 일체로 용진할 때라"는 유시를 내리고 손병희에게 통령을 임명하고 논산으로 가서 전봉준과 합류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였다. 12일부터 식량을 비롯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13일에는 전투병력의 편제를 정하였다. 선봉은 전경수, 후진은 전규석, 좌익은 이종훈, 우익은 이용구, 중군은 손병희가 맡았다. 그런데 호서 동학군의 뒤를 따라 내려 오던 이두황(李斗璜) 관군은 15일 늦게 보은 장내에 도착하였다. 2백호의 민가는 거의 비어 있고 겨우 남아 있던 20여 인도 관군이 오자 산으로 도망쳤다.

    관군은 400여 개의 초막에 불을 지르고 보은읍으로 돌아갔다가 16일에 회인으로 떠나버렸다. 전라도 동학군이 북상하므로 돌아 오라 하여 돌아간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10월 14일 삼례에서 출동하여 논산, 노성 일대에 진격하게 하였다. {전봉준공초}에 재기포한 날자가 10월 12일(양 11월 9일)이라 하였으므로 아마도 14일에는 논산으로 가 있었다고 보인다. 한편 손병희(1861년생) 통령은 14일에 청산을 출발하였다. {기문록}에는 "14일 저녁 때에 6∼7만 대진이 청산으로부터 (본읍, 영동에) 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손병희 통령이 이끄는 호서 동학군은 약 5천 명이었고 14일에 청산을 따나 영동 심천(深川)과 진산(珍山)을 거쳐 16일에 논산에 당도하였다.

    한편 옥천, 황간, 영동 동학군 2만여 명 중 1만 명은 회덕(懷德) 지명(芝明)으로 가서 관군과 교전한 다음 공주군 장기면(長岐面) 대교(大橋, 한다리)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호남·호서 동학군이 공주를 공격할 때 금강 북쪽에서 위협하도록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동학군이 공주를 목표로 삼은 것은 북상하는데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일 뿐만 아니라 지형적으로 산이 성처럼 사방으로 둘러있고 북서쪽에는 금강이 감싸고 있어 방어하기에 뛰어난 곳이었기 때문이다. 전봉준 장군은 공초에서 "공주감영은 산이 막히고 강이 둘러있어 지리가 뛰어나 이 곳을 차지하고 굳게 지킨다면 일본군도 쉽게 빼앗지 못할 것이므로 공주에 들어가 일본군에 격문을 보내 버텨보고자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이 먼저 차지하여 당초 계획은 빗나가 버렸다. 10월 16일 전봉준 장군은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 동학군이 도착하자 양호창의영수(兩湖倡義領袖) 명의로 충청감사에게 일본군을 같이 물리치자는 서한을 보냈다. 즉 "일본 원수가 트집을 잡아 틈을 내어 군대를 움직여 우리 군부를 핍박하고 우리 민중을 어지럽히고 근심케 하니 어찌 말하지 않으랴 … 각하는 맹성하고 의로써 같이 싸우자"고 하였다. 당시 논산에는 여산, 익산, 논산, 노성, 부여, 공주 동학군들도 모여들어 2만여 명에 이르렀다. 20일부터는 행동을 개시하여 노성(魯城)일대와 경천(敬天)일대로 진출하였다.

    {전봉준공초}에 의하면 공주 공격은 10월 23일부터라 하였다. 그리고 전투를 시작한 것은 23일부터이다. 공주로 들어가는 길은 많은데 동쪽은 효포를 거쳐 참새골, 남다리를 지나 금강을 끼고 장기대 나루로 가는 길이 있고, 효포(新基洞)에서 서쪽 산을 타고 곰티(熊峙)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동남쪽은 가마울을 거쳐 능선을 넘어 공주 금학동(金鶴洞) 큰골로 넘어가는 길과 남쪽 오실동(梧實洞) 뒷산을 넘어 금학동 하성다리로 가는 길이 있다. 다음은 남쪽 우금티로 넘어가는 길이 있으며 우금티 서쪽 견준산(犬 山)과 공주 서쪽 봉황산(鳳凰山) 사이에 있는 새재를 넘어 봉황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으며, 서쪽 금강을 따라 저대와 한산을 거쳐 봉황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1차 공격은 효포 쪽과 이인 쪽으로 나누어 들어갔다. 호남 동학군은 효포 쪽을, 호서 동학군은 이인 쪽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일부병력은 호서동학군이 효포 쪽으로, 호남 동학군이 이인 쪽으로 뒤섞여가기도 하였다. {시천교종역사}에는 "이인역에 이른 이용구는 옥녀봉에서 경병과 전투하였으며 경병은 패해 달아났다"고 하였다. 경리청 대관 백낙완(白樂浣)도 {남정록}에 손화중이 참전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손병희를 손화중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공방전이 벌어진 지점은 동쪽 효포(孝浦, 龍溪面 新基里)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인 웅치(熊峙, 곰티, 용계면과 공주시의 경계) 일대와 남쪽 우금티 길목인 이인 일대였다.

    호남 동학군은 23일에 널티(板峙)를 넘어 효포에 이르러 관군을 물리쳤다. {남정록}에 의하면 22일에 동학군이 경천에 왔다고 하자 경군 280명을 효포에 배치하여 파수케 하고, 280명은 부내에서 방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23일에 동학군이 널티를 넘어 효포를 향해 올라가자 효포에 배치되었던 관군은 겁을 먹고 도망쳐버렸다. 즉 "효포를 파수하던 장졸(280명)이 … 놀라 겁내어 … 금강을 건너 도망쳤다". 그래서 호남 동학군은 전투를 하지 않고 효포 일대를 장악하였다.

    전봉준 장군은 24일 새벽에 4천 명의 정예병력을 투입하여 곰티 산줄기에 뻗어 있는 여러 갈래의 능선으로 기어오르게 하였다. (후일 전봉준 장군과 공주성 공격을 다룰 때 자세히 소개키로 함). 관군은 2개로 나누어 곰티 아래와 위에 배치하고 급히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홍운섭이 이끄는 관군과 모리오(森尾)가 이끄는 일본군은 서둘러 24일 저녁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곧 금강진두(錦江津頭)와 봉수재(月城山)에 1개 소대씩 배치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안성군수 홍운섭(洪運燮)과 대관 조병완(曺秉完)은 1개 소대 병력으로 금강진두를 수비하였고, 참령관 구상조(具相祖)는 1개 소대병력으로 봉수재를 방어하게 하였다. 25일에는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은 계속 곰티를 방어케 하였고, 구상조와 일본군 30명은 남쪽에 있는 동학군의 좌측을 공격케 하였으며 홍운섭과 조병완은 동학군의 북쪽 우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한다리에 진주하였던 동학군은 24일에 관군의 기습을 받고 힘없이 무너져 협공작전은 차질을 가져 왔다. 관군은 한다리로 바로 가지 않고 북쪽 25리 지점에 있는 수촌(壽村)으로 돌아서 한다리 배후로 접근하였다.

    한다리 뒷산 숲과 들에 포진하고 있었던 동학군은 서쪽과 남쪽만 경계하고 있었다. 뜻밖에 북쪽 산 숲속에서 관군의 기습을 받게 되자 당황한 나머지 한나절만에 패하고 말았다. {순무사정보첩}에 의하면 "옥천포 동학도 수만 명이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 한다리에 모여 전봉준과 회합하려한다. … (24일) 첫 닭이 울자 곧 출발하였다. 25리 정도 돌아서 수촌에 이르러 조반을 먹고 한다리 뒷길을 따라 20리를 전진하였다. 멀리 바라보니 마을 뒤에 작은 골짜기 숲 속에 수천 명이 모여 있었다. 들에는 깃발을 둘러 세우고 수만 무리가 모여 있었다. 몰래 배후로 접근하여 숲 속의 적을 먼저 기습하였다. 조금 후에 산 아래서 포를 쏘며(ㅈ항하던 동학군은) 들에 있는 적들과 합류하였다.

    숲이 있는 골짜기를 탈거(奪據)하자 서로 총을 쏘며 한나절 전투를 벌였다. 적 20여 명을 사살하였고 생포도 6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동학군은 관군과 일본군이 배치되어 있는 맞은편 계곡이나 능선에 올라 대치하고 있었다. 전봉준 장군은 곰티에서 직접 지휘하여 공격에 들어갔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적세는 듣던 대로 산과 들에 가득 덮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소위 우두머리인 전봉준은 휘장을 드린 가마에 타고 깃발을 흔들고 태평소를 불며 벌떼처럼 둘러싸고 공격해 왔다"고 하였다. 곰티만 넘으면 공주이므로 전봉준 장군은 관군의 지원병력이 늘어나기 전에 곰티를 넘으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지형이 험준하여 2주야를 잠도 못 자고 공격했으나 좀처럼 전진할 수 없었다. 식량과 탄약도 떨어지고 피로도 겹쳐 할 수 없이 30리 후방인 경천으로 철수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은 다음과 같다.

    1, 22일(음 10월 25일) 오전 6시 공주 동면 능치치(陵峙峠, 곰재) 월성산(月城山) 등을 수비케 했던 경리영병으로부터 우세한 적군(대략 3백여 명)이 공주 동편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으며 3천여 명은 냉천(冷泉) 뒷산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2, 이러한 상황하에 공주에 있는 적도 정토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 제2중대(1소대와 2분대), 한국군 810명.

    3, 오전 8시 30분 중대가 능암산(陵庵山)에 이르러 적의 정세를 정찰해 보았더니 적도 약 3천여 명이 능암산에서 약 1천m 전방에 있는 냉천 뒷산에 있으면서 능치산과 월성산 등의 한국군과 교전 중이었다. 그리고 적군 몇 명이 우리의 우익인 능암산 기슭으로 나와 이 산을 점령하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니시오까(西岡) 조장에게 2분대를 이끌고 가서 능암산을 점령하려는 적도를 격퇴하고 또 냉천 뒷산에 있는 적도의 인원수를 정찰케 하였다.

    4, 여기서 우리 군대를 월성산과 능암산과의 중간에 배치하여 적의 측면과 배후를 향해 몇 번의 일제사격을 시도했지만 탄착점이 보이지 않고 거리가 맞지 않아서 사격을 중단하였다. 이렇게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오후 1시가 되었다.

    5, 오후 1시부터 냉천 뒷산의 적이 뒷쪽 산 위로 퇴각하였다. 그래서 한국군으로 냉천 뒷산을 점령하고 경계하도록 맡기고 중대를 이끌고 공주로 철수하였다.

    6, 적은 일몰에 이르러 결국 퇴각하여 경천지방에 집합한 듯하였다.

    7, 적정을 정찰토록 파견했던 니시오까 조장이 이끄는 분대의 병졸 스스기(鈴木善五郞)가 적의 유탄에 맞아 오른쪽 정강이에 부상을 입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곰티를 공격하던 동학군 중에는 40명 정도의 청국군이 끼어 있었다고 하였다. 즉 "11월 27일(음 11월 1일)자 재 공주 모리오(森尾)대위의 필기보고에 의하면 11월 21일(음 10월 24일)에 공주에 도달하여 동남에 있던 수만의 적도와 교전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다음날 22일(음 10월 25일) 미명부터 적도는 재차 공격해 왔으나 우리 군대가 이를 막았고 오후 1시경 이들을 격퇴하였다. … 일몰에 이르러 적도는 경천, 정산(定山) 방향으로 퇴각하였으며 그 중에는 청국군 40명 정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동학군 중 일부가 양총으로 무장한 것을 보고 청국군으로 오인한 것 같다. 한편 우금티의 길목인 이인 쪽을 담당했던 손병희 통령 휘하 호서 동학군은 23일에 이인으로 진출하여 우금티로 진출하려 하였다. 관군은 성하영(成夏永) 휘하 경리청 대관 윤영성(尹泳成)과 참모관 구완희(具完喜)가 이끄는 관군 약 350명이었고 일본군은 스즈끼(鈴木) 군조가 이끄는 약 30명이었다. 동학군은 지형이 유리한 산(翠屛山)으로 올라가 포진하고 공격에 나섰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동학군이 회선포(回旋砲)를 쏘아 관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고 하였다. 동학군 일부는 신식무기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나절을 대항하던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군에 밀려 우금티로 후퇴하고 말았다. 일부 동학군이 이인 뒷 쪽으로 돌아가 포위작전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관군과 일본군은 소수병력으로 출전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공주를 방어하는 데 치중하였다. 동원된 관군병력은 대략 810명이었고 공주 관영군은 약 4∼500명 정도, 그리고 일본군은 1개 중대(1개 소대와 2개 분대가 빠진 140명 내외)였다고 추측된다. 이인에 진출했던 동학군도 역시 노성으로 철수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1월 3일에 이르러 관군은 널티와 이인에 경리청 소대를 파견하여 동학군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동학군측에서도 10여 일간이나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증원병력의 보충과 식량 확보, 화약 비축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추운 날씨에 싸우자면 솜옷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전투지역에는 인가가 모두 비어있었고 날씨가 몹씨 추원 솜옷을 마련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3. 피의 우금티 공방전 2차 공격은 11월 8일부터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약 3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공주를 지키는 관군병력도 늘어나 2천 명 정도였고 일본군은 140명 정도였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판치에 나가 있는 구상조로부터 "8일 오후에 … 동학도 몇 만 명이 혹은 정천점(敬天店)에서 바로 올라오고, 혹은 노성 뒷쪽 봉을 넘어 포위하며 올라오고 있다. 포성이 진동하고 깃발이 어지럽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진격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하영도 "동학도 몇 만 명이 논산에서 곧바로 고개를 넘어 밀려오고 있으며 또한 몇 만 명은 오실(梧室) 산길을 따라 뒤를 끊고 에워싸고 있다"고 하였다. 적은 병력으로 막아내기 어려워 지형이 유리한 효포와 곰티 고봉 요새로 진지를 옮겨 … 동태를 살피고 있다"고 하였다. 이인에 나가 있던 관군은 밀려오는 동학군을 막지 못하고 우금티로 후퇴하였다. {남정록}에 의하면 140명의 관군을 거느리고 이인 남쪽에 있는 취병산에 있던 관군은 동학군에 포위되어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하였다. "11월 7일에 이인역 취병산에서 파수하고 있었는데 저녁 때에 동학군이 대군을 몰아 취병산을 둘러샀다. 포성은 우레와 같고 탄환은 우박 내리듯 하여 움직일 수 없었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밤중에 안개가 자욱히 산록을 뒤덮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겨우 빠져 나와 공주로 달려왔다"고 하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 산봉우리 요지를 지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반면 동학군은 험준한 산으로 공격해 올라가는데 온 힘을 기우렸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9일 날이 밝자 적의 진세(陣勢)를 살피니 각 진에서 서로 보이는 봉우리마다 온갖 깃발을 꽂고 있었다. 동쪽 널티 후봉에서 서쪽 봉황산 후록까지 30∼40리에 연달아 산상에 진을 치고 마치 사람으로 평풍을 두른 듯이 기세가 대단하다"고 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나타난 전투상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12월 4일(음 11월 8일)오후 4시 널티 지역을 맡고 있던 경리영병으로부터 오후 3시에 우세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자 점차 공주로 퇴각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2. 그 당시 공주에 있던 관군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 중대병력(1개 소대와 2개 분대가 빠졌음). 한국군 810명. 3. 위와 같은 보고서에 따라 한국군(통위영병) 250명에게는 월성산에 가서 요지를 점령하여 적을 막게 했으며 한국군(경리영병) 280명에게는 향봉 부근에서 월성산과 연락을 취하면서 적을 막게 하였다. 이인에 있던 경리영병 280명은 점차 우금치산으로 퇴각케 하였다. 2중대가 우금치산을 점령하였다. 오후 5시 20분 스즈끼 특무조장에게 그의 소대와 이인에서 퇴각해 온 한국군을 이끌고 우금티산과 이인가도를 수비케 하였다. 대위 모리오는 제3소대(2분대 빠짐)를 대리고 향봉 부근에 있었다. 4. 향봉에 이르러 적의 정세를 정찰하니 향봉산 위로부터 약 1, 400m 떨어진 산 위 일대에 적도가 무리로 모여 있었다.(약 2만 명). 활활 불을 지피고 동남쪽을 포위하면서 계속 총과 포를 쏘아댔다. 이렇게 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5. 5일(음 11월 9일) 오전 10시 이인 가도와 우금치산 사이 약 10리에 걸친 곳에 적도가 대략 1만여 명이 나타나 우리의 우익 서쪽을 향해 급진해 왔다. 그 기세가 맹렬하였다. 우금치산은 공주의 요지로서 이 곳을 잃으면 다시 공주를 지킬 방도가 없다. 이와 동시에 삼화산(三花山)의 적 (1만여 명)도 오실(梧實) 뒷산을 향해 전진하였는데 그 정세가 매우 급하였다. 그리고 이 곳 역시 공주의 요지로 천연의 험지이다. 그래서 나가노(中野) 군조에게 1개 분대와 한국군 1개 분대를 이끌고 오실 뒷산을 단단히 지키도록 하였다. 오전 10시 40분 우금치산에 이르러 적의 정세를 정찰하니, 적이 우금치산 전방 약 5백m에 있는 산 위로 전진해 왔다. 이 때 스즈끼(鈴木) 특무조장은 다음과 같이 배치하였다. ⑴ 1개 분대를 견준산(犬 山)의 산허리, 또 1개 분대를 우금치산 산허리와 이인가도 오른쪽(전방 도로를 막을 수 있는 곳). ⑵ 한국군(경리영병) 280명을 봉황산(전면과 오른 쪽 방어를 말함). ⑶ 나머지 2개 분대는 우금치산. 여기서 제3소대를 우금치산에 증파하여 일제사격으로서 전방 산 위 약 8백m가 되는 곳에 군집한 적을 대적케 했으며 경리영병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을 향해 사격토록 하였다. 그러나 적은 교묘하게 지형물을 이용, 약 2백여 명이 우금티산 꼭대기에서 약 150m 되는 산허리로 진격해 왔다. 그 선두의 5∼6명은 몇 m 앞 사각지점에 육박했고 앞산 위에 있던 적은 더욱더 전진해 왔다. 수 시간 동안 격전했는데 우리 군대가 가장 힘써 사웠다. 6. 오후 1시 40분 경리영병의 일부(50명)를 우금치산 전방 산허리로 진격시켜 우금치산 산꼭대기에서 140∼150m의 산허리에 걸쳐 있는 적의 왼쪽을 사격케 하였다. 그래서 적은 전방 약 5백m의 산꼭대기로 퇴각하였다. 오후 1시 20분 우금치산의 우리 군대를 그 전방 산허리로 진격시키고 경리영병에게 급사격을 시켰으며 적이 동요하는 것을 보고 1개 소대와 1개 분대로써 적진에 돌입케 하였다. 이에 이르러 적이 퇴각했으므로 경리영병에게 추격을 맡기고 중대는 이인가도로 나가 적의 퇴로를 다가가려고 하였다. 7. 중대는 이인가도로 나가 급추격, 드디어 이인 부근에 이르러 그 일대의 산허리에 불을 지르고 몰래 퇴각하였다. 그러나 동남쪽의 적도가 여전히 퇴각하지 않으므로 한국군에게 우금치산, 오실 뒷산, 향봉, 월성산 등의 경계를 맡기고 기타 대원은 공주로 철수하였다. 이 때가 오후 8시였다. 당시의 병력배치를 보면 통위영병 250명은 동쪽 월성산에, 경리영병 280명은 향봉 부근에 배치하여 월성산과 연락을 취하며 막게 하였다. 이인에 나가있던 경리영병 280명은 우금치산으로 철수시켜 배치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100명 정도는 우금치산 일대에 배치하였다. 나머지 40명은 향봉 부근에 배치하였다. 이에 비해 동학군 3만 명은 맞은편 봉우리마다 수백 명 씩 배치되어 있었다. 숫적으로 절대 우세하였으나 무기는 고작 유효사거리 30m 정도인 화승총으로 무장하였으므로 사거리 300m의 신식무기를 당해 낼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접근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피아간의 전투는 11월 9일 12시경부터 시작되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12월) 5일(음 11월 9일) 오전 10시 우금티 산에서 약 10리 떨어진 이인가도에 적도 1만여 명이 나타나 우익 서방을 향하여 다가왔다"고 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화산(二花山)의 적(약 1만명)은 오실 뒷산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하며 10시 40분 경에는 우금티에서 500m 떨어진 산상까지 이미 전진하여 왔다"고 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동학군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아, 저 비류 기만명의 무리들이 40∼50리에 걸쳐 둘려 쌌으며, 길이 있으면 쟁탈하고 고봉이 있으면 점거하고, 동쪽을 치는 척하고 서쪽을 치고 좌측에서 번득이다가 어느새 우측에 나타나 기치를 흔들고 북을 치면 이에 따라 죽음을 무릅쓰고 산에 먼저 오르려하니 그들의 의리는 어떤 것이며 그들의 담략은 어떤 것으로 설명하랴. 그 상황을 생각하면 등골이 떨리고 마음이 섬뜩해진다"고 하였다. 12시경에 동학군 2백여 명은 교묘하게 지형을 이용하여 우금티 전방 150m까지 접근하였다. 그 중 5∼60명은 몇 미터까지 다가왔다. 그러자 피아간의 공방전은 치열하게 벌어졌다. {갑오관보}에는 동학군의 공격모습을 "산등에 늘어서서 일시에 방포하고 산 안쪽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적이 봉우리를 넘으려 하면 (관군은) 다시 산등에 올라 총을 발사하기를 40∼50차례나 하니 시체가 산에 가득히 쌓였다"고 하였다. 수세에 몰렸던 일본군과 관군은 1시 40분경에 역공으로 나왔다. 경리영병 50명을 전진시켜 140m 내지 150m 떨어져 있는 동학군의 좌측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동학군은 즉각 산상으로 후퇴하여 응전하자 이때 일본군도 엄청나게 집중공격을 퍼부었다. 소비탄약이 2천 발이라 하였으니 집중공격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동학군은 움츠러들었고 2시 20분경에 일본군은 정면으로 공격하여 왔다.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 동학군은 이 때 우금티 서쪽과 봉황산 일대에서 공격전을 벌였다. {천도교서}에 의하면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용구(李容九), 임학선(林學善), 이승우(李承祐), 최영구(崔榮九) 등이 측근에서 할동하였다 한다. {시천교종역사}에 의하면 "드디어 봉황산으로 진격하자 경병과 일병이 산을 따라 사격하여 왔으며, 교도들은 죽움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양군은 10여 차례나 교전을 벌였다. 이용구는 정강이에 총상을 입었으며 일본군이 압박하자 힘이 딸려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논산까지 물러가 다시 모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맹열히 공격하던 동학군은 어째서 멈칫거렸을까. 일본군과 경리영병의 집중사격으로 많은 전사자가 생긴 탓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탄환과 화약이 떨어진 것이 주요 원인이 아닌가 싶다. 이 때를 놓지지 않은 일본군과 관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여유를 주지 않고 맹렬히 추격하였다. 이인쪽으로 10리 가량 후퇴하였을 때 그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산에다 불을 지르고 몰래 돌아갔다. 그러나 곰티와 향봉 쪽 동학군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11일 정오까지 피아간의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순무사정보첩}에 의하면 "적도 수천은 험준한 곳을 지키며 나오지 않아 격파할 계책이 없었다. 정오에 이르러 교장 이봉춘이 정병 10명으로 하여금 군복을 벗고 비류로 위장한 후 살며시 전진하였다.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산으로 올라가 앞에 나타나 일제 사격을 가하자 4∼5명이 쓰러졌다. 무리들은 무기를 버리고 몸만 빠져 달아났다. 고군(孤軍)이 될 염려가 있어 추격하지 못하고 총만 연달아 쏘았다. … 적의 동태를 탐지하니 흩어진 여당들은 곧 계룡산 등지로 갔다"고 하였다. 관군 10명이 기습하자 도망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허황된 기록은 관군기록에 가끔씩 나타난다. 노성으로 물러난 호남·호서 동학군은 12일에 창의소의 명의로 충청감사에게 척왜척화(斥倭斥華)를 위해 동심협력하자는 글을 보냈다. 요지는 "도는 다르나 조선사람끼리 척왜와 척화는 그 뜻이 같으니 두어 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기 돌려보고 충군우국지심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와 상의하여 척왜척화(斥倭斥華)하여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않게하고 동심합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자"고 하였다. 이 글을 받아본 충청감사의 반응은 감감했다. 4. 원평서 마지막 전투 동학군은 노성에서 항전해 보려고 수습해 보았으나 사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식량과 탄환도 여의치 않아 논산으로 다시 후퇴하였다. 논산 소토산(지금의 대건고등학교)에 일단 진지를 구축하였다가 여의치 않아 다시 전주로 후퇴하였다. 이 때 최난선(崔蘭善)이 이끄는 여산과 논산·강경, 익산지역 동학군 1천여 명이 달려와 이 곳에 진을 쳤다. {여산종리원연혁}에는 "본군 대접주 박치경 외 최난선 … 등이 미륵리에 집강소를 설하다. … 11월에 경병으로 더불어 공주, 논산 양처에서 교전하다"고 하였다. 김의환(金義煥)은 {혁명투사 전봉준}에서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군이 후퇴하고 있을 때 강동(江東, 江景)방면으로부터 1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공주전투를 후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여산 접주 최난선은 … 은진 황화대로 모아 추격해오는 관군과 최후의 혈전을 시도하였다"고 하였다. 이 전투는 여산 접주 최난선이 이 지역 동학군을 이끌고 와서 치룬 전투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통령은 11월 15일에 논산을 떠나 18일경에 전주로 들어갔다. 견고한 성을 이용하여 저항해 보려 했으나 군량미 마련이 여의치 않아 22일에 다시 금구 원평으로 떠났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의 요지를 보면 "전봉준이 성에 있으면서 주민을 선동하고 있다 하였다. … 정면은 일본군이, 그 뒤는 교도대가, 그리고 장위영·통위영 관군은 사방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본대가 10리쯤 전진했을 때 척후가 돌아와 말하기를 적군은 전날밤(22일)에 성을 버리고 금구로 도주하여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금구 원평으로 간 것은 김덕명 대접주가 있으므로 군량미 조달과 화약을 확보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재기포 이후 용계장(龍溪丈, 金德明)은 동학군의 군수물자를 마련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김덕명판결선고서 designtimesp=7907>에도 "금구지방에서 취군성당(聚群成黨)하야 관고의 군물을 찬탈하고 민간의 전곡을 약탈했다"고 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에도 "원평점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공곡과 공전을 거두어들이며 평민을 학대했다"고 하였다. 바로 원평(大都所)에서 김덕명은 동학군 군수물자 조달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23일부터 다시 대오를 정비하고 항쟁할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태인에도 만여 명 동학군이 집결해 있어 두 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전주에 이르러 수일을 유하고 금구군 토성에 이르러 관군으로 더불어 교전하다가 원평역에 이르러 견패(見敗)하다"고 하였다. {천도교서}에도 "관군으로 더불어 교전하다가 패하여 남으로 향할 때 논산, 여산, 익산, 전주, 금구, 태인, 정읍, 고부, 장성, 순창 등 제군을 경하여 임실군 갈담시에 지하다"고 하였다. 원평전투는 11월 25일 아침에 시작되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24일 아침에 전주에 입성했다가 이 날 오후에 다시 출발, 금구로 내려왔다. 여기서 하루를 자고 25일 아침 일찍 원평으로 출동한 것이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오전 9시부터 최영학(崔永學)이 이끄는 교도대 일대(약 350명)와 일본군 60명이 공격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였다. 교도중대장 보고에 의하면 이 달 24일 미시에 대관 최영학(崔永學)이 교도병 일대와 일본병 일대를 파송하여 금구읍에 이르러 밤을 새고 25일 오전 6시경에 행군하여 원평에 도착하니 적도 수만이 나팔소리 한번에 삼면으로 진을 벌려 品자형을 이루었다. 천보의 거리에서 서로가 포진하였다가 아침 9시경부터 저녁 5시까지 (전투를 벌였다). 포소리는 우레와 같았고 총알은 비 오듯하였다. 적은 산상에 있었고 우리는 들에 있었다. 사면 주위에서 지르는 함성은 천지를 흔들었고 포연이 자욱해서 원근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대관 최영학은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서 산에 오르며 호령 지휘하자 대오는 동서로 나뉘어 일시에 힘을 내어 다투어 올라갔다. 혹은 찌르고 혹은 참하며 37명의 적을 죽이니 나머지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 모이면 동학인 줄 알겠으나 흩어지면 농민과 같아 뒤쫓아 죽이기가 불가능하였다. 탈취한 군물은 화룡총 10자루, 조총 60자루, 총알 7석, 화약 5궤, 자포 10좌, 도창 200자루, 쌀 500석, 돈 3천냥 … 등이었으며 일본군에게 넘겼다. 원평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은 바로 태인으로 후퇴하여 이 곳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합류하였다. 그런데 손병희 통령은 태인에 머물지 않고 바로 임실로 향하였다. 태인 전투는 11월 27일 11시경부터 벌어졌다. {양호우선봉일기}에 의하면 관군은 230명이었고 일본군은 60명이었으며 동학군은 5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동학군은 성황산, 한가산, 도리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한가산과 도리산을 목표로 공격하였다. 하나는 대관 윤희영이 이끄는 관군 90명과 일본군 30명은 서쪽 길로 공격하였고 대관 이규식이 이끄는 관군 140명과 일본군 30명은 동쪽 길로 공격하였다. 몇 시간만에 관군은 산상을 점령했으나 이미 동학군은 성황산으로 모두 집결하여 맹렬히 저항하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하산하여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몇 시간을 두고 고전하다가 유리한 지형을 확보한 관군과 일본군은 집중사격을 가하여 해질 무렵에 동학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동학군은 30명이 쓰러졌고 40명이 생포되어 살해당했다. 생포자에게 물오보니 거괴는 전봉준이며 그 밑에 김문행(金文行), 유공만(劉公萬), 문행민(文行敏)이 지휘하였다고 한다. 손병희 통령이 갈담으로 넘어 온 경로는 분명치 않다. {천도교회사초고}에 "익일 태인, 정읍 등지에서 다시 취합하니 도중이 수십만이라, 장성군 노령(갈재)을 유하여 유진하고 익일에 순창군을 경하여 임실 갈담으로 행진하니 도중이 피곤함을 불감하더라"고 하였다. 아마도 정읍 내장산 가을재(秋嶺)을 넘어 순창 복흥(福興)을 거쳐 쌍치, 산내, 임실 갈담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다. 내장산 가을재를 갈재로 알고 장성 갈재로 갔다고 착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임실 갈담으로 간 것은 청운면 새목터(鳥項)에 해월 선생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임실현 민충식(閔忠植) 현감은 동학에 입도한 사람이므로 안전한 곳이었다. {천도교서}와 {천도교회사초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0월 13일 신사 호남으로 행하실 새 임실군 이병춘(李炳春)가에서 9일간을 유숙하다가 다시 동군 새목터(鳥項里) 조석걸(趙錫杰)가에 지하사 연류하시더니 1일은 신사 '도인을 불러 갈담시(葛潭市)에 왕견하라'하시다. 시시에 손병희 과연 당도하거늘 영접하여 신사에 배알케 되니 시는 11월 19일이러라"(천도교서) 11월에 해월신사주 … 장수군 계남면 신전리(薪田里) 박일양(朴一陽)가에서 일야를 숙하시고 동면 동촌리(東村里) 김종학(金鍾學)가에서 일야를 숙하시고 동군 산서면 동곶이(東串址)로, 남원을 경하시어 임실군 양경보(梁景寶)가에서 수일을 유숙하시고 동면(靑雄面) 조항리 허선(許善)가에서 수일을 유류하실새 일일은 봉서를 수하사 왈 '가단시(柯團市)를 가면 대군이 지할 것이니 차 서신을 전하라'시고 인을 파송하셨더니 과연 대군을 가단시에서 봉한 바 그 대군을 통솔한 이는 손병희러가.(천도교회사초고) {천도교서}에 손병희 통령이 이끄는 동학군이 갈담(柯團市)에 당도한 날자를 11월 19일라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11월 27일에 태인을 떠났으므로 11월 29일이 될 것이다. 손병희는 새목터로 와서 신사를 모시고 12월 1일에 새목터 고개를 넘어 오수(獒樹)로 갔다. 여기서 다시 장수와 무주를 거쳐 12월 9일에 영동까지 진출하였다. 오는 도중 장수에서 "누차 관군과 교전하였다" 했으나 지방 민보군을 만나 소규모의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주에서도 "이응백(李應伯)이란 자 민보군을 솔하고 추격하거늘 … 도중이 대성 돌격하자 민보군이 대궤하다"고 하였다. 이응백은 민보군이 아니라 무주접주였으며 11월 9일에 용담현을 공격할 때 삼부자가 동학군 수천 명을 이끌고 성을 점령했던 분명한 동학지도자이다. 장수, 무주를 거치면서 인원 수는 늘어났으며 다시 영동에 이르러 더욱 늘어나 약 3천 명은 되었다고 짐작된다. 즉 장수와 무주에서 약 1천 명이 늘어났고 영동에 이르러 약 1천명이 더 늘어났다고 추측된다. {소모일기}에 보면 "영동지방의 비도는 1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원이 늘어나자 무기와 식량이 더 필요했으며 그래서 영동 관아를 점령하는 한편 황간까지 진출하여 무기 등을 탈취하였다. {토비대략}에 의하면 "무주로부터 어제(9일) 오후에 나타나 영동과 황간을 점령하고 군기와 재물도 약탈해 갔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영동군수는 무주 설천(雪川)과 영동 월전(月田, 설천에서 2㎞) 의병들이 동학군의 습격을 받고 접전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고 알려왔다. 이 소식을 듣고 사태가 위급해지자 밤을 새워 인근 고을과 관군 주둔지에 구원을 청하였다. 5. 용산장과 보은 북실전투 원병이 오기 전에 영동은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군수는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김산 군수는 영남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정예포수 200명을 선발하여 추풍령에 배치하는 소동을 피웠다. 또한 김산 군수는 상주 소모영에 "비류 4∼5천명이 무주에서 영남으로 방향을 돌려 이미 옥천 양산(陽山) 등지에 이르렀으니 … 상주 소모영병 200명 정도를 파송하여 추풍령에서 힘을 합쳐 막도록 하자"고 청원하였다. 상주의 모동(牟東), 모서(牟西) 대소민들도 "비도 기천 명이 지금 청산 등지에 유진하고 있으니 상주로 넘어올 염려가 있으므로 방어대책을 세워달라"고 촉구하였다. 동학군은 일단 무장을 보충한 후 용산장으로 이동하였다. 영동에 모였던 일부 동학군은 옥천 양산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일부 동학군은 용산장으로 직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서원(水西院, 水松院)을 거쳐 황간으로 진출했던 동학군도 용산장으로 북상하였다. 그 중 일부 동학군은 상주 모동까지 진출했던 것 같다. 또한 용산장에 거의 와서 수석(水石)에 들러 이판서와 정반(鄭班) 두 집을 불사르고 죽전(竹田)에 들러 40여 호를 불살랐다. {기문록}에 의하면 죽전에서는 노치선(盧致先) 형제를 살해했으며 용산에서는 강용구(姜容九)를 살해했다고 하였다. 호서 동학군이 공주를 공격하러 갔을 때인 10월 14일 이후 11월 9일 사이에 보수세력들은 지방 동학지도자와 교도를 많이 잡아다 학살하였다.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는 자들을 골라 그 죄를 추궁한 것으로 보인다. 상주 소모영은 다급한 나머지 150명을 선발하여 모서 모동을 거쳐 용산장으로 급파하였다. 이들은 밤에 길을 재촉하여 80리를 달려 10일에 모서 적도(杓桃, 작두벌)에 이르렀다. 한편 북에서는 청주 관병과 박정빈(朴正彬)이 이끄는 옥천 민보군 450명이 출동하여 청산에 갔다가 용산장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11일 아침에 출동한 상주 소모영군은 용산장 인근에 이르러 살펴보니 동학군들은 용산장 뒷산에 올라가 포진하고 있었다. 그 형세는 철통같았으며 엄청났다. 11일의 전투상황에 대해 {토비대략}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병력을 3개대로 나누어 전초 50명에게는 용산 뒤 골짜기로 들어가면 사면이 산인데 그 속에 길이 있다. 반쯤 들어가면 적이 반드시 치러 나올 것이다. 너희들은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고 골짜기 입구로 끌어내도록 하라. 동북 모퉁이에서 총소리가 연달아 들려오면 몸을 돌려 발포토록 하라고 명을 내렸다. 중초와 후초에게는 용산 골짜기 입구의 산머리가 높으니 너희들은 좌우산하에 매복해 있다가 동북에서 포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방포토록 하라. 나는 동북 모통에서 지휘할 것이니 대기하라고 명령하였다. 전초는 명령대로 길을 따라 반쯤 들어가 적을 만나 총을 쏘며 교전하였다. (그런데) 적이 먼저 달아나자 적이 달아난다고 고함을 질렀다. 이 소리를 들은 복병은 일제히 일어나 급히 달려갔다. 적은 드디어 산 위로 올라가 어지럽게 총을 쏘아대니 마치 비를 쏟아 붓는 것 같았다. … 적이 달아난다는 소리만 듣고 제김에 용기가 생겨 다투어 추격하여 들어갔다. … 이미 마간능에 이르러 골짜기 속에 갇히게 되었다. 적들은 산 위 사면에 둘려 있었다. 나는 달려가 소리쳐 전초를 구출하여 동북 모퉁이로 나와 추격하는 적을 쏘았다. 중초와 후초도 잠시 후에 돌아와 모이게 되어 대오를 갖추고 다시 싸웠다. … 드디어 (후퇴를 거듭하여) 적도(작도벌)에 이르자 동민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끌고 길을 막았다. 말하기를 인근 동민들 … 공은 떠나지 말라고 하였다. … 곧 동민을 시켜 숲 속 여러 곳에 연기를 피우게 하고 밤이 되자 살며시 군졸을 율계(栗溪)로 옮겨 목을 방비하였다. {토비대략}은 상주 소모영 유격장 김석중이 기록한 것으로 과장된 흔적이 너무나 많다. {기문록}에 보면 "11일 … 상주 병정은 회고치(灰古峙)에서 싸우다 병정 2인이 죽었으며 패주했다"고 하였다. 회고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여기서 패했다고 하였다. {소모사실}에 의하면 "11일 아침에 병졸을 인솔하고 용산 후곡에 이르러 곧 그 예봉을 막고 전투에 들어갔다. 드디어 적이 후퇴하자 의병들은 추격하여 산골짜기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적의 포군 수천은 산 위 좌우에 둘러싸고 굽어보며 총을 쏘아대니 총알이 비오듯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다. 의병들은 올려다보며 공격하다가 얼마 후 한발씩 물러서며 총을 쏘며 동편 맞은 산에 올라가 일제히 방포하니 포성은 천둥소리와 같았다. 적은 비록 약간 움츠러 들었으나 지형이 불리한데다 적은 많아 대적하기 어려워 부득이 대오를 수습하여 서서히 퇴진하면서 평지로 유인해 보았다. 적은 역시 매복해 있는 것을 알고 끝내 하산하지 않았다. 서로 대치하다 저녁 때가 되자 드디어 율계(栗溪)로 후퇴하여 유진했다"고 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시에 손병희 대진을 솔하고 영동군 용산시장에 전지하니 후에는 경군이 추격하고 전에는 태산이 앙천한데 청주 관병과 부상배와 민보군이 사위로 포격하니 포연이 장천하여 진퇴유곡이라. 어시에 신사 손병희로 더불어 송전에 입하여 천사께 고하고 전행(前行)할 계를 협의하여 왈 제인이 만일 천을 신하거던 관군이 재전함을 불구하고 전진하라 하시니 수만 도중이 다 북향 고천하고 일심으로 궤위(潰圍) 전진하니 관군이 총검을 기척(棄擲)하고 사산(四散) 도주하더라. 시시에 손병희는 주의에 탄흔이 다하고 강건회(姜健會, 관군)는 중환 혼도하였다가 인히 회생하니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사실과 전반대되게 기록하였다. 당시의 전투상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처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용산장터 뒷산이 분명하다. 현재 용산장터는 구촌리에 있으나 1921년 이전에는 용산리에 있었다. "동학군들은 용산장 뒷산으로 모두 올라가 포진하고 있었다"하므로 상용산리 서북쪽에서 용산리 동남쪽까지 약 3㎞에 걸쳐 길게 뻗은 야산 일대에 동학군이 포진하였던 것이다. 이 야산줄기를 넘어가면 노루메기에서 수리(壽里)에 이르기까지 긴 계곡이 있다. 산세는 완만하며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서 동서로 여러 지맥이 뻗어 계곡을 이루웠다. 동학군은 상용산과 용상리, 구촌리, 그리고 뒤쪽인 노루메기, 수리, 율리 일대에 있는 민가에 머물고 있었다. 신항리(新項里) 2구 배정열(87) 부부는 부친으로부터 들었다며 "동학군이 마을마다 가득 찼었다"고 하였다. 배정열 부인(90)은 "여자들도 돌을 날라다 주었다"고 하며, 타지에서 온 동학군도 많았지만 이 지방 동학군들도 많았다고 하였다. {토비대략}에는 동학군의 추격을 받고 간신히 상주 모서면 작두벌까지 20리나 후퇴하였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 밤중에 다시 10리를 후퇴하여 율계(栗溪, 牟西面 花峴里)에 갔다. 다음 날인 12일에는 청주병과 옥천 민보군 450명의 상용산리 동북쪽에서 공격해오자 전투가 벌어졌다. 청산에 주둔했다가 동학군이 용산장에 있음을 알고 공격해 온 것이다. 동학군은 역시 산으로 올라가 유리한 지점을 점령하였다. 이날은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지리를 잘 모르는 청주병과 옥천 민보군은 골짜기로 깊이 들어갔다가 어느덧 포위상태에 빠졌다. 결국 몇 시간 전투하다가 수명의 사상자를 내고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토비대략}에는 김석중이 달려가서 구원했다 하였으나 앞뒤가 맞지 않는다. 40여리나 떨어진 율계에서 오고가자면 7시간은 걸린다. {소모사실}에는 상주 소모영군이 "사람을 보내 정탐하니 청주병정과 옥천의병이 적과 접전하고 있다 하므로 병사를 이끌고 40리를 달려가 앞뒤를 공격하려 했으나 이미 청주, 옥천 병정은 퇴각하고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청주병과 옥천 민보군은 "탄환이 떨어져 부득이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고 있다. 관군과 민보군을 물리친 동학군은 13일에 청산으로 넘어가 15일까지 머물렀다. {기문록}에는 "14일 청산에 머물렀는데 소사동(小蛇洞, 靑山面)에서 전투가 벌어져 다시 승리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청산 민보군의 공격을 받자 이를 물리친 것으로 보인다. 집으로 돌아온 많은 동학군은 휴식을 취하는 한편 신발과 식량과 겨울옷을 준비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이 추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자 15일에 다시 떠나야 했다. 원암을 거쳐 일단 16일에 보은으로 들어가 하루를 묵고 17일 저녁에 북실로 이동하였다. 이 날 밤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은 낙동에 있던 병참군인 1개 분대와 대구에 있던 1개 분대, 그리고 금산지역에서 군로(軍路)실측을 하고 있던 14명의 병력을 차출하여 동학군 토벌에 투입하였다. 황간현감으로부터 "동학도 약 1만여 명을 최법헌(신사 해월 최시형)이 이끌고 전라도 무주로부터 행진해와 이미 황간 부근 옛 근거지인 서수원에 머물고 바야흐로 황간을 습격하려 한다"는 통보를 받은 구와하라(桑原) 소위는 14명의 병력을 이끌고 12월 10일(양 1월 5일) 황간으로 처음 출동하였다. 황간으로 갔으나 용산으로 떠났으므로 13일에 뒤 따라 갔다. 그러나 용산에도 없었으므로 하루를 자고 14일에 상주 모서면 율계로 진출하여 상주 소모영군 200명을 위시하여 용궁현의 포수 20명, 함창 포수 19명과 합류하였다. 김석중이 사람을 보내 일본군을 율계로 오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오후 11시쯤에는 낙동의 이세가와(伊勢川) 군조도 1개 분대(8명)를 이끌고 도착하여 합류하였다. 이들은 동학군의 뒤를 따라 청산을 거쳐 원암으로 갔다. 대구의 미다꾸(三宅) 대위가 1개 분대(13명)를 이끌고 와서 여기서 다시 합류하였다. 일본군과 민보군 270명은 보은 북실에 동학군이 주둔한 것을 확인하고 출발하였다. 귀인교(貴人橋, 求仁里의 긴다리)에서 저녁을 먹고 야간공격을 하기로 결정한 후 밤 10시까지 기다렸다. 밤 10시 30분에 이 곳을 출발한 일본군과 민보군은 종곡리 입구 인근에 접근하여 파수를 보던 동학군 4명을 붙잡아 동학군의 동태를 알게 되었다. {소모사실}에 의하면 "오른 쪽을 파수하고 있던 4명의 비도를 덮쳐 잡아 먼저 거괴들의 소재처와 적들의 정세를 물었다. 대답하기를 거괴 최시형은 저녁 전까지 본촌 김소촌가에 있었으나 그 사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그 집에는 차괴 임국호, 정대춘, 이국빈, 손응구가 같이 있었다. 방금 밥을 지어 먹으며 술과 떡을 먹으려 한다. 나머지 무리들도 집에 가득하며 이 마을 남녀들은 모두 다른 마을로 달아나 숨었다"고 하였다. 일본군과 민보군은 누하리(樓下里)에 있는 김소촌가를 덮쳐 동학지도부를 잡으려고 포위 사격했으나 일반 동학군 5명만 즉사하고 지도급은 한 사람도 잡을 수 없었다. 불을 질러 시신을 불태우자 인근의 동학군은 총성을 듣고 불길을 보자 곧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기록에는 종곡까지 몰래들어가 불을 피우고 있던 동학군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모사실}에는 좌변 산상에서 포성이 들리더니 총알이 우박을 뿌리듯 하였다고 했으며 달빛아래 둘러보니 그들은 산상에 널려 있고 우리 병사는 골짜기에 있었다. 해시(10시∼11시)부터 전투가 벌어져 급히 위로 공격하였다. 종곡은 넓은 골짜기이지만 한 가운데 삼태기처럼 생긴 야산이 들어앉아 있다. 길이 1㎞, 너비 400m 가량의 야산으로 이 곳 사람들은 솥처럼 생겼다하여 가마실이라 하며 안쪽 지형은 높고 양쪽 날개는 둥글게 뻗어내려 마치 양팔을 벌려 둥글게 안고 있는 형태이다. 특히 양쪽으로 밋밋하게 흘러내린 산줄기의 안쪽은 완만한데 비해 바깥쪽은 가 팔아 토성처럼 되어 있다. 동학군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려고 이 곳에 왔던 것 같다. 지방민들은 처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이 가마실 입구였다고 한다. 전투가 몇 시간 계속되자 동학군은 밀리기 시작하더니 날이 밝자 1㎞ 가량 후퇴하여 가마실 끝자락을 벗어나 종곡 뒷산과 우측 다라니 뒷산 일대에 포진하였다. {토비대략}에서는 이 야간 전투에서 3백여 명이 사살되었다고 하나 파수보던 동학군 외에 사살된 사람은 피아간에 없었던 것 같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 …야습을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오후 6시쯤 종곡에서 10리 남짓 떨어진 귀인교읍에 이르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9, … 오후 10시 30분 이 곳을 출발 미다꾸(三宅) 대위와 상주 한병 240명은 왼쪽 큰길로 행진하고 소관(桑原少尉)은 부하 14명과 이세가와 군조의 1개 분대를 이끌고 오른쪽 산길을 행진하였다. 이날 밤은 눈이 많이 내려 추위가 뼈를 쑤셔 걷기에도 곤란하였다. 거의 5리 넘게 행진했을 때 전방에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지방민을 만나 물어보니 바로 동학도의 짓이라 하였다. 즉각 앞으로 전진하여 종곡 남쪽 고지(종곡에서 약 80m 떨어진 곳)를 점령하였더니 동학도 약 1만 명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각기 몸을 녹이고 있었으며 조금도 방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이 부근 파랑부랑(바람부리)으로부터 진군해 오는 미다꾸 대위에게 사자를 달려가게 하여 함께 공격하도록 통첩해 놓고 흩어져서 세 번 일제사격을 가해 그들의 정신을 교란케 한 다음 돌입하였다. 그들은 당황하여 마을 밖으로 달아났다. 약 1천m를 추격하여 요지를 택해 점령하였다. 이 때가 오전 3시였다. 미다꾸 대위도 와서 회동했다. 잠시 후 그들은 또 몇 번 역습해 왔으므로 마침내 전투를 계속하면서 밤을 새웠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도중이 수히 보은군 북실리에 지하여 야(밤)에 청주병이 습격함을 조하여 사상이 심중하였고"라 하였다. 그리고 {토비대략}에는 "세 갈래로 진군하는데 대위는 본병(민보군) 50명과 일본군 22명을 이끌고 좌측 길로, 소위는 본병 50명과 일본군 16인을 이끌고 우측 길로 들어갔다. 나는 나머지 별포 40명을 이끌고 중로로 들어갔다. 그리고 삼초장(三哨長)에게 50명을 나누어 먼저 가도록 하였다. 세 길이 합하는 데서 접응(接應)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부분은 인원수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일본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해시(밤 11시)에 드디어 일제히 방포하며 삼로에서 진공하였다. … 적도들은 … 동분서주하다가 … 갑자기 포성이 들리자 하늘이 동하고 함성이 들리자 땅이 흔들렸다. 마치 앉아 있던 사람 산(人山)이 서북 모퉁이에서 부출(浮出)하는 것 같더니 팽팽 소리를 내며 머리와 어깨 위로 벌이 지나듯하며 우박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모든 병사들을 급히 일자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포 한방 쏘고 한 발 나가게 하였다. 전투는 인시(새벽 4시경)에 이르자 적의 포향이 약간 자자들었다. 18일 아침 8시쯤 동학군은 함성을 지르며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외로 엄청난 동학군이 맹렬하게 공격해 오자 민보군들이 두려워 어찌할 줄을 몰랐다. 엄하게 단속하여 중앙으로 전진하라고 독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좌우로 나뉘어 가마실 야산에서 종곡과 다라니 쪽으로 전진 배치하여 공격을 저지하면서 전투는 치열하게 벌어졌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9, … 10, 13일(음 18일) 오전 7시 다시 공격하기 위해 약 500m를 전진하여 종곡 부근 고지를 점령하였다. … 그들도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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