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파(묵암)비망록 위작설’에 대한 비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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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파(묵암)비망록 위작설’에 대한 비판2
황태연(동국대핚교 정치외교핚과 명예교수)
이종일은 3·1혁명을 “이 운동은 우리나라 2천만의 대한족이 정의와 인도의 깃발을 높이 들고 근대적 충과 신을 갑옷으로 삼고 붉은 피를 포화로 대신한 창세기 이래 최초의 맨손혁명운동이었다”고 평가한다.최우석은 이종일의 이 평가가 1920년 12월 출간한 『독립운동지혈사』에서 박은식이 3·1운동을 평하여 “紀元四千二百五十二年三月一日 卽我二千萬韓族擧正義人道之旗幟 以忠信爲甲冑 以赤血代火礮 開倉前古未有之徒手革命特佔世界活舞臺之日也”(단기 4525년 3월 1일은 우리 2000만 한족이 정의와 인도의 기치를 들고 충신을 갑옷 삼고 적혈을 화포 삼아 세계개창 이래 전대에 없는 맨손혁명으로 세계활동 무대를 특점한 날이다)라고 쓴 구절과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이것을 이현희가 박은식의 글을 삽입하여 비망록을 조작한 것이라 지적한다. “이 시기는 이종일이 감옥에 갇혀 있던 시기로 정보의 접근성이나 기록의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데도 수많은 독립운동기사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기사 추가는 (...)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나 ????조선총독부관보???? 등 모종의 자료를 베껴서 자료의 신빙성을 높이거나 보강하는 형식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료를 분실했지만 원문 공개는 이미 80% 이루어졌다고 말했던 그가 창작·가필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사후에 내용을 보충해 써넣은 사람을 이종일이 아니라 이현희로 추단推斷하는 이 ‘가혹한, 그러나 단순무식한 속단에 불과한’ 비판은 고인이 된 ‘학자 이현희’의 인격을 사후에 완전히 파괴하는 수준의 구폐성狗吠聲이기 쉽다.
이종일이 체험한 3월 1일 당일의 기억이나 수형생활의 기억을 기록한 부분을 제외하고 3·1혁명과 관련된 내용들은 이종일이 2년 8개월 뒤 출옥하고 나서 사후적으로 매운 것이다. 이종일은 관련기록과 기사들을 참조해서 2년 8개월간의 빈칸을 채웠을 것이다. 이 일은 이현희가 추가한 것이 아니라 이종일이 추가한 것이다. 아마 “맨손혁명”과 관련된 저 구절은 이종일이 출옥한 1921년 12월 22일 이후 《독립운동지혈사》를 읽고 저 구절을 옮겨 썼을 것이다. 이종일은 독립협회 운동시절 박은식의 절친한 동지였고,강유위康有爲의 사상적 동정, 의화단의 활동, 러시아군의 움직임, 한국을 열국의 공동보호 아래 중립화하자고 제안한 러시아공사의 동향, 청국공사의 동향, 중국신문 《청의보淸議報》 참조, 1902년 2월 28일 영일동맹 소식 등 중국과 국제사회의 사정에 밝았다. 따라서 당시 유명해진 책 《독립운동지혈사》를 아마 출옥 후 일착으로 구해 읽었을 것이다. 따라서 저 구절은 옥파가 옮겨 썼으면 썼지, 이현희가 옮겨 쓴 것이 아니다.
그런데 부수적으로 밝혀두고 싶은 것은 박은식의 저 표현도 그의 독창적 표현이 아닐 수 있다. 중국 북경에서 발간되던 ????중화신보中華新報????의 1919년 3월 7일자 기사는 “한국의 이번 독립운동은 (...) 그야말로 맨손혁명(徒手革命)이다. (...) 이 맨손혁명은 21세기 최신식 혁명이다”라고 이미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은식은 필경 이 기사의 표현을 본떴을 것이다.
또 최우석은 이종일이 다른 사람의 말과 비슷한 말을 쓴 경우면 이것을 이현희가 가필한 말로 몰았다. 가령 이종일의 말 “반도 3천리가 모두 감옥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중들이 지금 자기들의 집에 살고 있지만 감옥에서 살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구절이 박화성의 《타오르는 별》(1972)에 나오는 “어딘 감옥이 아닌가? 우리가 조선이라는 큰 감옥에 갇혀 있는데 어딜 간들 다 마찬가지겠지 별 수 있겠니?” 유관순의 말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현희의 가필·조작이라는 것이다.
이 지적이 옳은가? 그런데 ‘이 감옥은 작은 감옥이고 바깥세상은 큰 감옥일 뿐이다’라는 흰소리는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의 「떠밀려든 의식(das zurückgedrängte Bewußtsein)」 절에서도 볼 수 있는 일반적 속언이다. 박화성의 표현이 오히려 이런 고전에서 흘러나와 떠도는 보편적 속언을 모방한 것이고, 이종일도 이런 배경에서 저런 표현을 얼마든지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슷한 표현들을 이현희가 <옥파비망록>을 조작한 증거로 들이대는 최우석의 논증은 귀담아들어 줄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특히 날씨를 적지 않은 시점부터는 당일 기록으로 적지 않고 나중에 띄엄띄엄 적어 넣어서 특정 사건 날짜를 잘못 기억하여 기입한 오류나 단순히 오기한 오류가 없을 수 없다. 따라서 이후 기록은 이런저런 오류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1919년 3월 7일 “광화문의 기념비각과 동대문 문 위에는 3월 1일 오전 10시부터 시민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웅성대더니 오후에는 수천 명으로 늘어나 독립만세를 절규했다”는 이종일의 기록을 최우석은 이현희가 1월 28일 고종 장례식 연습 장면의 사진과 3월 3일이나 5일 장례식행렬을 구경하던 군중의 사진을 묘사한 내용을 추가한 것으로 보았다.그러나 이현희가 그런 식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은 제로이고 옥파가 나중에 듣고 쓴 것이다. 3월 1일 파고다공원에 모인 학식·시민 군중을 기록할 때 이종일은 글머리에 이미 “듣건대”라는 말을 붙여놓고 있다.따라서 저 “광화문의 기념비각과 동대문 문 위”의 장면 묘사도 출옥 후에 ‘듣고’ 쓴 것이다.
옥파비망록의 가필·왜곡을 비판 주장 가운데 가장 가소로운 것은 2월 20일부터 25일까지 1차로 독립선언문을 2만5000매, 27일 2차로 1만 매를 더 인쇄했다는 ????묵암비망록????의 기록이 3·1운동 당시 긴박했던 준비과정과 민족대표 선정과정상 그런 인쇄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이유로 이현희가 ????묵암비망록????을 가필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박찬승의 설說이다. 그러나 이종일이 독립선언서 인쇄 전담자였기 때문에 3·1독립만세 준비과정과 민족대표 선정과정 때문에 이 인쇄작업이 방해받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 주장을 ‘가장 가소롭다’고 한 것이다.
<옥파비망록> 전반을 내용적으로 잘 살펴 읽어 볼 때 이현희가 조작했을 것으로 가정한다면 도저히 조작할 수 없는 그 시대의 수많은 구체적 사실들이 등장한다. 물론 <옥파비망록>에는 여기저기 역주 형식의 가필도 띄고, 개념을 훼손하는 부적절 번역(가령 “國民國家”를 ‘국민국가’가 아니라 “국민의 국가”, “국민을 위한 국가”로 번역한 것)도 눈에 띈다. 탈초·편집과정에서는 좀 심한 가필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생전에 <옥파비망록> 원전 자체의 공개를 꺼린 것은 원전 독점욕 때문이라기보다 이 ‘좀 심한 가필’이 밝혀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판독불가 부분은 “□□”로 표시해주고 낙질도 반드시 밝혀주고 있다. 이것은 그가 ‘창작’을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실한 편역編譯 노력을 보여주는 증좌다. 이 때문에 최우석조차도 100% 위작 판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림”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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