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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독립운동


    천도교는 경술년(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근 10년 동안 힘을 기르면서 여러 방면으로 독립운동을 거사할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하였습니다.


    ① 교단 안에 민주적인 의사원(議事院) 제도를 새로 두고 지방 대표를 중앙에 상주케 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습니다.
    ② 우이동에 봉황각(鳳凰閣) 수도원을 설립하여 지방대표 약 500명을 뽑아 7차에 걸쳐 수련을 실시, 독립정신을 기르게 하고 이들이 지방에서 독립운동 거사에 주동이 되게 하였습니다.
    ③ 비밀히 독립운동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 신축기금의 명목으로 자금을 마련토록 하였습니다.
    ④ 전국의 교도로 하여금 기미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 광복 특별기도를 봉행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전국 교구에 등사기를 마련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서 전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거사할 방침을 세워 나갔습니다.

     

    이리하여 포덕 60년(1919년) 1월에 의암성사 자택에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여러 차례 모여서 회합한 끝에 다음과 같이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① 각계의 분산적 독립운동을 단일화하여 각계의 중진들을 망라한 「민족대표」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을 할 것.
    ② 독립선언서를 다수 인쇄하여 전국에 살포하고 전 민중과 더불어 대중적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토록 할 것.
    ③ 일본 정부와 의회 및 조선 총독부, 그리고 파리 강화회의 각국 대표와 특히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의견서를 제출할 것.
    ④ 독립선언서 및 서면의 작성 의뢰와 각계 섭외활동 등의 계획 실행을 최린이 담당할 것.

     

    그리고 이 운동의 방법으로

    ① 거족적 운동으로 대중화할 것이며
    ② 분파적으로 하지 않고 일원화하되
    ③ 비폭력적 무저항주의로 할 것

     

    등 세 가지 원칙을 확정지었습니다.

     

    그 후 최린은 2월초 자택에서 송진우·현상윤·최남선 등과 회합을 가지고 앞서 세운 독립운동 계획에 찬동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4일후 다시 계동 중앙학교에서 네 사람이 재차 회합하여 숙의한 결과 ① 구한국 시대 요로 인물을 설득하고 기독교와 함께 민족대표 수십 인의 명의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하고 ② 독립 선언서 및 의견서 등 서면 기초는 최남선이 담당하도록 합의하였습 니다.

     

    이어 최남선과 송진우는 구한국 시대 요인을 찾아 각각 교섭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한편 최남선은 기독교와 교섭하기 위하여 정주의 이승훈을 만나고자 현상윤으로 하여금 상경하도록 전언을 의뢰하였습니다. 현상윤은 다시 정노식 집에 유숙 중이던 정주 사람 김도태에게 부탁, 김도태는 2월 8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9일에 정주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은 선천에 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박현환에게 상경하도록 말을 전하게 한 결과 이승훈은 2월 11일에 급거 상경하였습니다.

     

    한편 이무렵 재일 동경 유학생들이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국내에서 일본 관헌의 경계가 자못 심하여졌습니다. 이 때 최남선은 지목을 피하기 위하여 이승훈과 직접 만나지를 못하고 송진우로 하여금 만나 상의하게 하였습니다. 송진우는 이승훈에게 천도교측의 독립운동 계획을 말하고 기독교에서 같이 합류하기를 권하자 쾌히 찬동하였습니다.


    이승훈은 다음날 선천으로 내려가 기독교의 이명룡외 세 사람과 회합하여 찬동을 얻고 다시 14일에는 평양에 가서 길선주·신흥식 등과 만나 찬동을 얻었습니다. 그 후 이승훈은 재차 상경하여 기독교 청년회에 있는 박희도와 상면하여 기독교측의 독자적인 독립운동 모의에 참석하였습니다. 2월 20일 모의한 결과는 ①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되 ②경성 및 지방에서 청원서에 서명할 동지를 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이와 때를 같이하여 기독교계의 함태영, 안세환, 이갑성 등을 중심으로 별도의 독립운동 모의가 있었습니다.

     

    그 후 2월 21일에 최남선은 이승훈을 만나 그와 함께 최린을 방문하여 의견을 교환하게 되었는데 최린은 기독교측의 독립청원서 제출 계획을 듣고 독립청원보다 독립선언이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교파가 다르다 하여 서로 다르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간곡하게 합류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에 이승훈은 다른 동지와 협의하여 회답키로 약속하는 한편 독립운동비조로 자금을 마련하도록 요구하고 헤어졌습니다. 이에 최린은 의암성사에게 운동자금 융통에 대한 승인을 얻어 5천원을 22일 이승훈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후 이승훈은 함태영과 함께 기독교측 대표로서 천도교측 섭외 대표인 최린과 여러 차례 협의한 끝에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법을 합의하였습니다.


    ① 독립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 낙원동의 탑골공원에서 행합니다.
    ② 독립선언문을 민중에게 살포하는 동시 학생단과 민중으로 하여금 만세시위행진을 감행토록 합니다.
    ③ 각 지방 거사는 중앙을 모방토록 하고 선언서 발송등 지방 연락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각기 지방 조직을 통해서 분담합니다.
    ④ 독립선언서의 기초, 인쇄, 서명 등은 천도교측이 담당합니다.
    ⑤ 일본 정부와 의회에 대한 서류 제출은 임규, 안세환에게 서면을 주어 2월 27일 서울을 출발케 합니다.
    ⑥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 각국 대표에 대한 서면 제출은 기독교측에서 담당합니다.
    ⑦ 민족 대표로 연서할 사람은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 10여 명으로 정하기로 하고 불교측 대표는 최린이 한용운을 만나 약간인 참가키로 합니다.


    이리하여 민족 대표 33인이 정해지고 2월 28일 저녁 의암성사댁에 민족대표가 회동하여 다음날 3월 1일의 거사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합의한 결과 독립선언서 낭독을 태화관에서 하기로 변경한 것 외에는 모두 당초 계획대로 재확인하였습니다.

     

    드디어 3월 1일이 왔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평화적 독립운동의 빛나는 기원이 될 이 날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불렀습니다. 때맞추어 탑골공원에서는 남녀 학생단이 모여 일반 민중과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드높게 외치면서 시가로 쏟아져 나와 시위 행진을 감행하였습니다.


    같은 날 평양과 해주, 의주, 길주, 원주, 서산, 전주, 진주 등지에서 거사하고 연이어 삼천리 방방 곡곡에서 성난 파도와 같이 남녀노소가 총칼 앞에 맨주먹으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으로 민족대표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투옥당하고 이름없는 많은 애국지사가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해외에서는 망명지사를 중심으로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게 되고. 숭고한 3·1정신은 그 후 대한민국 건국정신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