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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유적지

    [3.1운동유적지]  봉황각

    명칭 봉황각
    설명 3.1운동을 이끌 천도교 지도자를 양성한 곳
    주소 서울시 성북구 우이동
    방문자 수 1243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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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천도교와 3.1독립운동 ◇



    1. 경술국치(庚戌國恥)와 의암성사

    포덕 35년 동학혁명 당시 일제는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한반도에서 청국세력을 몰아내고 동학군마저 철저히 소탕하면서 이미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위한 야욕을 드러냈다. 그 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포덕 46(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우리 나라의 지배권을 장악한 후 전국 각처에서 저항하는 의병들을 철저히 소탕하는 등 계획된 수순에 따라 합방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한편 시천교를 별립한 이용구는 일본군부의 비호 아래 일진회를 내세워 포덕 50년 12월 4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한일합병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서슴지 않고 노골적인 매국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의암성사는 ‘광제창생(廣濟蒼生)’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이용구의 성명서를 반박하면서 일진회와 시천교를 성토하였다. (1909년 12월 9일 [大韓每日新聞] 게재)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일진회를 매도하는 여론이 비등했고 시천교의 교세는 급속도로 위축되어 갔다. 결국 일제는 포덕 51(1910)년 경술년 6월에 먼저 우리 나라의 경찰권을 장악하고 드디어 8월에 강압적인 한일 합방을 단행하여 우리 나라를 강점하였던 것이다.

    (1) 국권회복을 향한 의암성사의 결의


    경술국치를 당하자 의암성사는 이 소식을 듣고 얼굴에 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흥비가에 있는 말씀은 바로 오늘을 예언한 것이라. 몰각한 자가 바로 이용구가 아니고 무언인가. 사대아부(事大阿附)는 비자주성(非自主性)이요, 파벌독재(派閥獨裁)는 비민주성(非民主性)이요, 훼예모욕(毁譽侮辱)은 비민족성(非民族性)이니 이상은 3대 망국근성이니라. 앞으로 국권회복(國權回復)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 고 하였다.


    일제는 강압적으로 한일합병을 성공시킨 직후 교육기관과 종교단체를 제외한 한반도의 모든 사회단체를 전격적으로 해산시키면서 효용가치가 없어진 일진회마저 가차없이 해산시켜버렸다. 결과적으로 일제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한 이용구는 이를 분통하게 여긴 나머지 한일합병 2년 후에 그 업보로 죽고 말았다.


    한편 천도교의 기관지를 발행하는 월보사의 주간 이교홍 등 간부진은 강제합병 소식을 접하고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강제합병을 성토하는 성명서를 비밀리에 보냈다. 그러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는 바람에 [천도교회월보]는 창간되자마자 간부진이 전면 교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와 같이 천도교가 한일합병에 강력히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동학혁명을 통해서 천도교의 배일사상을 잘 알고 있는 일제는 항상 천도교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제는 합병 다음해인 포덕 52년 4월에 제2헌병분대 村田多忠 분대장이 의암성사를 출두케 하여 협박을 했다. 첫째로 의암성사가 출입할 때 쌍두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오만하고 사치한 행동이며, 종령을 발하고 따로 포덕 연호를 쓰는 것은 마치 왕과 같이 행세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둘째는 교도로부터 강제성을 띠고 성미를 바치게 하는 것은 마치 정부가 조세를 징수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불법이 아니냐는 것이다. 셋째는 우매한 사람들을 허위로 날조하여 천도교에 입교시켜 그 수가 3백만이라고 하니 이것은 장차 조선의 성인인구 1천 4백만명 중에 3분의 2를 입교시켜 조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 포덕에 힘쓰는 것이 아니냐고 협박했다.

    (2) 쌍두마차와 상춘원(常春園) 원유회


    이런 일이 있은 후 의암성사는 일제의 탄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기부행위를 금지한 그들의 법령에 따라 한때 부득이 성미제를 폐지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도록 하다가 포덕 55년부터는 성미를 무기명제로 바꾸어 시행했다. 그러나 쌍두마차는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 의암성사는 공식방문이나 나들이 할 때 검은 칠흑의 윤기 나는 화려한 쌍두마차를 이용했다. 쌍두마차는 정장차림에 모자를 쓴 중국인 마부가 앞쪽에서 말을 몰고 뒤쪽에는 같은 차림의 수행원이 서서 의암성사를 호위했다. 화려한 쌍두마차가 달릴 때는 임금의 위엄도 무색할 만큼 당당했다. 뿐만 아니라 의암성사는 우리나라 민간 승용차 제1호인 포드 승용차를 몰고 서울 시내를 질주했다. 이 승용차는 일본에서 공진회(共進會, 세계박람회)가 열렸을 때 출품된 것을 의암성사가 입교시킨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공이 주선하여 구입한 것으로 역시 운전수는 중국인이었다.


    철종(哲宗)의 부마 박영효(朴泳孝)는 의암성사가 일본에 망명하고 있을 때부터 친교를 맺고 있었는데, 그가 재산을 처분할 때 동대문 밖에 있는 그의 별장을 포덕 56년 7월에 의암성사가 매입하여 상춘원(常春園)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상춘원은 대지 10,165평에 2층 양관(洋館)과 여러 채의 한옥 등 모두 백여칸의 건물이 있으며 매입 후 정원과 건물을 새로 꾸미고 후원에 만화정(萬化亭)을 지었다.


    의암성사는 매년 천일기념 등 중요한 기념일마다 낙산(駱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상춘원에서 연회를 크게 베풀어 많은 교인들과 직접 대면하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포덕 57년 천일기념에는 경향각지에서 5천여명의 교인이 송현동 대교당에 모여 기념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 상춘원으로 초청하여 대원유회(大園遊會)를 열고 교인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이날 상춘원에는 명월관(明月館) 등 일류 요릿집에서 출장 나와 교인들을 마음껏 음식을 들었고, 무대에는 장안의 기생 광대 등 백여명의 연예인들이 하루 종일 풍악을 울리며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날 교인들 뿐만이 아니라 이웃 주민들까지 엄청난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보다 앞서 포덕 55년 8월 14일 지일기념일에는 기념식 후 한강에서 40여척의 유람선을 띄워 지방 교역자 5백여명과 더불어 여흥을 즐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처사에 대해 일부에서는 교인들의 성금으로 지나친 낭비와 사치를 부린다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의암성사는 그러한 세평에 일체 개의치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배일 독립사상이 강한 천도교의 3세 교조 의암성사가 사치스런 생활에 탐닉하고 있다는 인상을 세상에 풍김으로써 일제의 감시를 누그러뜨리고 조금이나마 그들의 감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의도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은도시대에 장기간에 걸쳐 온갖 탄압을 받아왔던 교인들을 위무하고 자긍심을 불러 일으키려는 의도에서였다. 상춘원의 대연회는 바로 그런 의암성사의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셋째는 3백만 교도의 지도자로서, 또한 민족의 운명을 걸머지고 나아갈 지도자로서, 비록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우리 겨레를 멸시 천대하더라도 정신적으로나마 그들의 위세를 제압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과시함으로써 민족의 울분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게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때문에 의암성사는 세평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감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그러한 의암성사의 호방한 생활에 대해 오히려 긍지를 가지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호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의암성사는 당시 寺內 총독이 만나자고 하였을 때도 쌍두마차를 타고 남산 총독부 청사에 가서 일본 총독과 만나 당당히 논쟁을 하였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2. 봉황각 건축과 전국 교역자 특별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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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에 대한 남다른 결의를 다지고 있던 의암성사는 전국의 교역자들에게 먼저 독립의지를 확고히 심어주기 위해 수련도장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꼈다.


    포덕 52년 어느 날 의암성사는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공과 세상의 이목을 피해 우이동 골짜기에서 밀회(密會)를 하면서 나라의 장래를 논의한 적이 있었다. 이 해 가을 의암성사는 춘암상사를 비롯한 총부 간부진을 대동하고 다시 우이동 심산유곡을 찾아가 금융관장 윤구영(尹龜榮)에게 우이동 계곡 일대의 산림지대를 매입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윤구영은 이 일대 임야와 밭 2만 7천 946평을 매입하고 이 곳에 수련도장을 짓기도 했다.


    공사는 다음해 3월 7일 기공하여 누각 모양의 28평 남짓한 목조 기와집과 내실(18평 2홉) 및 부속건물(8평 3홉)을 완공하고 6월 19일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 건물을 봉황각(鳳凰閣)이라 이름지었다.


    또한 포덕 54년 4월에 12칸 짜리 건물을 더 지어 수련도장으로 사용하였으나 이 건물은 3.1독립운동 후 헐어버렸다.


    의암성사는 장차의 독립운동에 대비하여 봉황각에서 전국의 고위교역자 483명을 49일씩 7회에 걸쳐 특별히 연성수련을 시행했다. 제1회 수련은 4월 15일부터 시행되었는데 오영창(吳榮昌)을 비롯한 21명이 참가했다. 그 때는 봉황각이 완공되기 전이어서 그 위쪽에 있는 도선암(道詵庵)에서 수련했다. 그 후 계속해서 제2회 49명, 제3회 49명, 제4회 49명, 제5회 105명, 제6회 105명, 제7회 105명의 교역자가 포덕 55년 3월 25일까지 봉황각에서 일곱 번에 걸쳐 연성수련에 참가했다.


    3년에 걸쳐 시행한 봉황각 연성수련을 통하여 의암성사는 이신환성(以身換性)성령출세(性靈出世)에 대한 법설을 위주로 강론하였다. 의암성사는 연성의 묘법이 이신환성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유형한 나를 무형한 나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육신의 나’로부터 생기는 모든 인연을 끊는다면 자연히 ‘본연한 성령의 나’가 된다고 하면서 사람은 평소에 견실한 수양을 쌓지 않으면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 흔들리게 되므로 반드시 수련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생명의 주의화(主義化)를 강조한 것으로, 때가 닥치면 나라와 겨레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인내천, 성신쌍전, 규모일치, 무체법경 등 많은 법설을 강론하였으며 아침 저녁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천도교가 3.1독립운동 당시 전국 조직망을 가동하여 일제히 궐기할 수 있었던 정신적 원동력이 이 때의 연성수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3.1독립운동과 관련해서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특별시에서는 포덕 110(1969)년 9월에 봉황각을 서울시 향토문화재 제2호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보다 앞서 포덕 77년에 재정난으로 봉황각 부지 7,904평을 매각한데 이어 포덕 107년에 다시 480평을 매각하여 현재 19,562평으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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